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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채널예스 : 최재훈의 시네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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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 없는 자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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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오코너의 원작<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가난으로 붕괴된 가족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인생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열한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 가혹한 현실, 그 속에서 수치스럽고 슬프고, 화가 나는 상황들을 딱 그 나이 아이의 감성으로 그려낸다. 소설 속 조지아는 세상 다 산 것 같은 애어른도 아니고, 속 깊고 다정한 아이도 아니다. 열한 살 아이답게 이기적이고, 딱 그 나이만큼 순진하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조지아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그래도 가족이라는 끈을 잡고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모습까지 더해져, 가족의 붕괴 속에 오히려 가족애의 회복이라는 역설을 녹여낸다. 이를 통해 절망의 순간에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가치를 깨닫는 색다른 형식의 성장소설이었다. 소재가 기발하고, 묘사가 참신해서  술술 넘어가는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화되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게 한국에서 만들어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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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정서라는 것은 ‘공감’을 형성하는 바탕이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때 무척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일본판 <링>은 ‘한’이라는 동양적 정서의 유사성 때문에 한국판 리메이크작도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미국판 <링>은 동양적 정서가 사라져 밋밋했다. <주온>이나 <장화홍련>을 리메이크한 미국판 영화들이 시시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반면 퓨전 사극 속에 양반사회의 안온함을 비웃었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프랑스의 18세기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하지만 한국적 정서를 매끄럽게 녹여내면서 이물감 없는 영화가 되었다. 문제는 역시 정서와 그로 인한 공감이다. 국내 영화 중 최초로 영미권 소설을 영화화한<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성공 여부도 거기에 달려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원작의 군더더기 없는 블랙 유머와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군더더기가 많은 감정 과잉처럼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원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지나친 신파의 과잉을 걷어내고 동화적이고 따뜻한 한국적 정서를 잘 담아낸 영화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따뜻하고 귀여운 영화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정서의 이물감을 메우기 위해 김성호 감독은 원작의 큰 뼈대인 ‘개를 훔친다’는 설정은 두고 소소한 에피소드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정서를 부각시킨다. 어느 순간 아빠와 함께 집이 사라진 지소(이레)는 동생 지석과 철부지 같은 엄마(강혜정)와 함께 피자집 미니 봉고에서 지낸다. 집을 곧 구하겠다는 엄마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집을 구하기 위해, 지소는 친구와 함께 부잣집 개를 납치한 후 사례금을 받을 계획을 세운다. 개를 훔치는 계획을 세우는 순간, 아이들을 귀여운 악동이 되어 영화의 전개는 흡사 천진하고 재미있는 도둑질을 하는 ‘케이퍼 필름 caper film’이 된다. (‘케이퍼 필름’은 뭔가를 훔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범죄, 갱스터 영화에서 파생된 서브 장르라 할 수 있다.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과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시리즈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발랄한 편집과 CG를 통해 아이의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공들여 만든 작전 노트는 그 자체로 동화가 된다. 큰 악당은 없지만, 소소한 욕심쟁이들을 통해 일그러지는 이야기도 큰 소동 없이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동화’를 표방하는 전체적인 구조에서 큰 무리는 없다. 김성호 감독은 성장 영화의 미덕을 여러 인물들에게 나눠주는 따뜻함도 잃지 않는다. 주인공 지소뿐만 아니라, 노부인(김혜자), 노숙자(최민수)는 모두 아이들을 통해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철없는 엄마였던 정현(강혜정) 역시 책임감을 느끼며, 온전한 가장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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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적 따뜻함을 걷고 보면,<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가족의 해체, 실업문제, 노숙자 문제 등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산재한 현실을 반영하는 무척 슬프고 애타는 이야기이다. 이레, 이지원, 홍은택 아역 3인방의 깜찍함에 김혜자, 강혜정, 최민수라는 든든한 배우들이 주변부에서 단단하게 울타리를 쳐준 덕분에 영화는 믿어봄직한 이야기가 되고, 아이들의 깜찍한 절도가 동화적 판타지가 되는 순간이 가능했다. 물론 이 모든 인물들이 딱 그만큼의 기능적인 역할 이외에 유기적으로 작용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영화와 소설 속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가장의 부재, 바닥으로 내몰린 처지는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절망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토록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의 손을 잡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화해의 열쇠는 ‘사랑’이란 순도 백퍼센트 동화적 결말은 거부할 도리가 없다. 사실  ‘작정’이 없는 자들이 생존하는 방법이, 이 팍팍한 세상을 견뎌내는 방법이 ‘희망’과 낙관적 관망 이외에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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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를 결정할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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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라는 명사에 따르는 동사는 ‘주다’가 아니라 ‘베풀다’이다. ‘베풀다’가 내포하는 것이 희생, 포기, 관용이라는 점에서 타인에게 선의를 요구하거나 바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서로를 위해 맞잡은 손과 돈독하게 이어가는 연대는 그게 판타지일지라도 믿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은 조금 더 냉정하다. 그들은 기대가능한 판타지를 최대한 걷어내고,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자들의 낮은 목소리와 이기심까지도 품어낸다. 그리고 타인을 위한 선의를 가지기가, 타인에게 선의를 요구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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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으로 오랜 병가를 마치고 복직을 앞둔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복귀를 앞 둔 금요일 오후,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직장 동료 16명이 참여한 투표 결과 산드라는 복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산드라의 복직과 각 1,000 유로의 보너스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동료들이 보너스를 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투표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이의가 받아들여져, 다음 주 월요일 재투표가 결정되었다. 영화의 원제처럼 산드라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 Deux jours, une nuit’이다. 복직을 위해 과반수의 표를 얻어야 하기에 그녀는 주말 동안 동료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려 한다. 산드라의 목표는 명확하지만, 그 과정은 마주하기 두려운 먹먹한 현실이다. 동료들과 마주 서서 자신의 복직을 위해 보너스를 포기하라고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7년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라 비 앙 로즈>에서 신경병적인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하면서 200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마리옹 꼬띠아르가 이번에는 힘겹게 우울증을 겪으면서, 자신의 직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산드라가 되었다. 그녀는 산드라가 겪는 모든 감정의 굴곡을 눈빛과 표정, 그리고 투덕거리는 발걸음 속에 모두 녹여낸다.

 

다르덴 형제는 산드라가 겪을 많은 경우의 수를 보여주면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다채롭게 변주한다. 관객들은 산드라의 상황에 공감하며 동료들의 선의를 함께 기대하고 갈구한다. 그 결과에 따라 산드라가 겪는 무안함, 좌절, 용기, 분노, 절망, 고마움, 미안함 등의 다양한 감정을 공유한다. 산드라가 만나는 동료들의 면면은 모두 다르다. 첫 투표에서 보너스를 선택한 것이 미안하다며 우는 사람도 있고,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변명하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문전박대를 하는 사람도 있다. 계약직 직원은 산드라를 도왔다가 재계약을 못할까봐 불안해한다. 다르덴 형제는 산드라의 내적 갈등을 충실히 따르면서,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의 현실에도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시험에 든 사람은 산드라 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너스와 동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 역시 절박한 갈등 앞에서 망설인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산드라의 복직을 응원하면서 동시에 내가 만약 저 상황이라면 동료를 위해 당장 필요한 돈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되씹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산드라의 처지를 되짚어 보자. 이미 16명의 동료 중 14명이 자기 자신이 아닌 보너스를 선택했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녀는 안다. 그 결론을 앞에 두고, 용기를 내야하지만 그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산드라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의사가 끊으라고 하는 약을 계속 먹어대고, 자식과 남편의 격려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물을 삼키지만, 사람들과의 만남은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힘들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최초의 목적은 동료들의 마음을 돌려 복직을 하는 것이지만, 동료들과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산드라는 진정 나를 구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의 선의를 마주하는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화를 내거나 소리치기는 쉽지만,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는 그 민망하고 낯 뜨거운 장면과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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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했을지 모를 그 일을 산드라는 되짚어가면서, 나의 생존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복직과 동료들과의 만남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 신의, 그리고 따뜻한 배려를 배운다. 차곡차곡 쌓은 감정의 격랑을 고스란히 함께 겪은 관객들은 산드라의 거취를 결정하는 마지막 투표를 앞두고 함께 마음의 소동을 공유한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촬영기법과 인물의 뒤를 쫓는 카메라의 불안한 떨림, 연기자라기보다 이웃의 노동자 같은 조연 배우들의 평범한 모습에는 산드라의 우울증 못지않게 무겁고 지겨워 보이는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때문에 산드라도, 그녀를 응원하는 관객도 산드라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들에게 반감을 가지기는 힘들다.

 

다르덴 형제가 말하는 <내일을 위한 시간>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며 자학하던 산드라가 용기를 얻는 순간, 그녀의 이틀은 기적처럼 작은 변화들을 만든다. 사람의 선의를 믿고, 그 요청에 진심으로 반응하는 순간 연대가 생기고, 변화 가능한 희망이 싹튼다는 것을 영화는 줄곧 주문처럼 읊조린다. ‘내일 tomorrow’과 ‘내 일 my job’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아낸 한국 제목처럼 산드라의 주말은 ‘내 일을 위한 내일’의 시간이 된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다르덴 형제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순식간에 마무리되는 엔딩 장면에 담겨있다. 그때까지 산드라는 사람들의 선택에 좌지우지 되는 상황일 뿐, 정작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선의를 선택할 수 있는 그 순간에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 결말은 너무나 단호해서 경쾌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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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가 된 아버지의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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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말에는 묵직한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낭만적 힘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뜻 아버지를 말하긴 어려웠다. 아버지는 늘 부재중이거나 등을 돌리고, 가족이란 이름에 길게 그늘을 드리운 존재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터지면 골치 아프지만, 떼어버려도 별다른 문제없는 맹장처럼, 가족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화두로 소환해낸<국제시장>은 예상대로 관객 천만을 가뿐히 넘겼다. 하지만<국제시장>속 아버지는 익숙함에도 친숙하지 않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인간적 모습을 잃은 채 영웅의 이미지에 갇힌 가부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와 가족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배워보지 못한 아버지는 제 목소리를 내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동정 받지 못하고, 아련하기만 한 이름이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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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처럼 격변기를 거쳐 꿋꿋이 삶을 살아낸 부모도 있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딱히 용기도 없는 소시민이었던 우리 부모들은 소용도 대책도 없는 가난하고 지난한 삶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내 자식 목구멍에 음식 넘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뼈와 살이라도 팔 수 있었을 거란 어른들의 나른하고 반복적인 회고담 속에는 고단한 삶을 견뎌온 자신의 뚝심에 대한 예찬도 있고, 그렇게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자식에 대한 원망도 있고, 고단한 자신의 삶이 나름 가치 있는 것이었단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까지도 담겨 있다. 하정우가 주연과 감독을 맡은 영화 <허삼관>은 지독한 가난 속에서 피를 팔아 가족을 건사하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 보편적 회고담이 아니다. 허삼관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대표성 대신,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어떤 아버지가 있다는 정도만 보여준다. 소동 끝에 드디어 아버지가 되어보려는 한 남자의 어떤 이야기인 셈이다. 그럼에도 <허삼관>은 친숙해 보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 아버지(였으면 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배경은 1950년대 충난 공주. 가난하지만 패기 있는 청년 허삼관(하정우)는 마을 최고의 인기녀 허옥란(하지원)을 사랑한다. 그녀의 선심을 얻기 위해 가진 것 없는 그는 피를 팔아 얻은 돈으로 그녀의 선심을 얻고, 옥란 아버지(이경영)의 마음도 얻어 그 집안의 데릴사위가 된다. 10년 뒤 일락, 이락, 삼락이라는 세 아들의 부모가 된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마을에 소문이 돈다. 일락이가 옥란이 시집가기 전 잠시 사귄 남자 하소용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혈액검사 결과, 일락이는 허삼관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충격을 받은 허삼관은 아내보다 일락이가 더 밉다. 그래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구박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락이가 병으로 쓰러진다.

 

알려진 대로 영화<허삼관>은 중국 소설가 위화의 작품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지독한 가난을 풍자와 해학으로 품어낸 원작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허삼관>은 그 스토리를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기승전결을 잘 아우르는 이야기는 수많은 배우들의 등장에도 산만하지 않고, 적당한 시점에 웃음과 눈물을 조화롭게 섞어 극의 완급조절도 해낸다. 한 마디로 <허삼관>은 딱히 모나지도 않고, 크게 흠잡을 곳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하정우 감독은 철없는 허삼관이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을 큰 무리 없이 재치 있고 가볍게 그려낸다. 전작 <롤러코스터>가 지녔던 매니아적 유머코드와 지독함은 걷어내고, 조금은 쉽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다가가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남의 자식을 키워낸다는 마을 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락이를 아들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두 가지 소동은 굉장히 극적이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매혈’의 서울행을 벌이는 장면에선 배우 하정우의 연기력과 감독 하정우의 연출력이 만나 서로 상승작용을 벌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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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메오 수준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배우들은<허삼관>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 되었다. 사실 감독 하정우 보다는, 배우 하정우와의 인연으로 출연했을 배우들의 면면은 정말 대단하다. 장광, 주진모, 성동일, 김영애, 전혜진, 이경영, 정만식, 조진웅, 김성균, 그리고 윤은혜가 등장한다. 그렇게 한국영화계를 이끌어가는 대표 주조연 배우들이 쉴 틈 없이 등장한다. 굵직한 존재감을 가진 배우들임에도 나서서 홀로 두드러지려는 법 없이 극에 잘 녹아들어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배우들이 대부분 기능적인 역할로 한걸음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배우들을 모아뒀다면 뭔가 더 대단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관객들의 기대는 그들이 별다른 기능없이 등퇴장을 반복하는 동안 무너진다.<허삼관>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마을과 배우들의 연기 톤, 극의 전환 등은 연극 공부 좀 한 사람이라면, 아는 브레히트의 연극을 보는 것처럼 낯선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분명한 의도였을지 모르겠지만, 관객들이 극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상업영화를 지향함이 분명한 영화의 결과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영화화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마음을 끌었던 부분은 지독한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삶의 해학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깊은 해학 보다는 단발성 농담으로 이어진다. 그렇게<허삼관>은 무난하지만 기대한 것처럼 탱탱하고 찰진 이야기를 품어내지는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허삼관>을 보고난 후라면 분명 먹고 싶어지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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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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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내딛을 때마다 아픈 기억의 편린들이 길 위에 차곡차곡 쌓이고, 단편적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 길은 마음의 지도가 된다. 압도적인 자연의 풍광과 그 아름다움을 기대한다면, 솔직히 실망할 수도 있다. 사실 거대한 자연의 풍광을 제대로 담아내기만 했다면, 관객들은 훨씬 더 쉽게 매혹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일드> 속 자연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렇게 무심한 자연의 표정은 한 여인의 고통스러운 내면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카메라가 향하는 시선은 물기 없이 갈라진 한 여인의 마음이다. 거친 자연은 그 동안 한 여인이 살아온 그 길 자체가 되어, 걸음걸음 마음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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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일드>는 절망과 방탕 속에 내 인생의 길이 끝났다고 느끼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미국 서부 4,200km를 도보로 종단한다.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는 더 큰 배낭을 짊어지고, 남자들도 완주하기 어렵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걷고 또 걷는다. PCT란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도보여행 코스이다. 거친 등산로와 눈 덮인 고산지대, 9개의 사막과 산맥, 평원과 화산지대까지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연 환경을 거쳐야 하기에 일명 ‘악마의 코스’로 불린다. 대체 왜 그녀는 수행과 같은 이 여정 속으로 자신을 투척한 것일까?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는 가정 폭력으로 일그러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던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실감에 젖은 그녀는 섹스와 마약으로 스스로의 삶을 후벼 판다. 한없이 너그러운 남편이 옆에 있고 여전히 돌봐야 할 어린 동생도 있지만 한번 휘청대기 시작한 걸음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잊는다. 나락의 끝에 서서 문득 정신을 차린 셰릴은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극한의 도보여행인 PCT를 선택한다. 주술처럼 엄마가 이야기했던 ‘자랑스러운 딸’로 돌아가기 위해 연간 125명만이 평균 152일에 걸쳐서 완주에 성공한다는 그 코스를 그녀는 94일 만에 걸어낸다.

 

영화<와일드>는 실제로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인이 PCT의 경험을 녹여 발간한 동명 자서전 와일드』를 바탕으로 한다. 2012년 출간된 저서 일드』는 발간과 동시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원작에 크게 감동한 리즈 위더스푼은 자신이 직접 차린 영화제작사에서 제작하기 위해 셰릴 스트레이드로부터 직접 판권을 구매하였고, 자서전일드』에 감동한 어바웃 어 보이』의 원작가 닉 혼비는 직접 각본을 쓰겠다고 연락했다. 여기에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장 마크 발레 감독이 연출을 맡으면서 영화 <와일드>는 날개를 달았다. 사실 극한의 자연환경 속 혼자 떠나는 트래킹 여행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영화가 과연 관객을 매혹시킬 수 있을지 우려했지만, 영화의 제작자이자 주인공인 리즈 위더스푼은 스스로를 영화에 던지면서 그 우려를 잠재웠다. 셰릴 스트레이드가 겪었을 여정을 가급적 그대로 겪고 재현하면서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될 정도의 투혼을 발휘한 리즈 위더스푼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그 동안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여주었던 화사한 발랄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 속 셰릴 스트레이드는 ‘몸이 그댈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격언을 방명록 위에,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에 새긴다. 신체적 고통을 훨씬 더 웃도는 마음의 소동을 겪으며 그녀는 앙상하게 남은 자신의 마음과 대화한다. 그리고 그 거친 길 위에서 발톱까지 빠지는 고통을 겪으며 체현하는 것은 슬픔을 초월하는 방법이 아니라, 고통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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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점에서 보자면, 엄마의 죽음이 자신의 삶을 방탕하게 내던질 만큼 대단한 걸까라는 의문은 생긴다. 하지만<와일드>는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한 여인의 일탈과 슬픔의 무게 자체에 동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그녀의 삶 그 자체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객이라도, 영화<와일드>가 주는 메시지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와일드>는 한 여인의 삶을 보여주고, 그녀를 응원하는 영화라기보다 묵직한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여정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도움에 앞서 우리 두 발로 무거운 짐을 진 체 꿋꿋이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단단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인은 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지만, 여행이 끝난 후에 그녀가 발견한 것은 힘들더라도 내 두 발로 딛고 걸어야 할 새로운 길이다. 영화에는 줄곧 엄마 바비(로라 던)이 생전에 좋아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가 흐르는데, 영화가 끝난 뒤엔 자연스럽게 그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그리고 마치 주술처럼 그 노래를 부르면 왠지 용감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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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기에 훌륭함이 틀림없다”

 

앤디 워홀이 남긴 ‘빅 아이즈’ 현상에 대한 평으로 영화<빅 아이즈>는 시작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커다란 눈의 소녀 그림은 프린트를 통해 차곡차곡 쌓인다. 팀 버튼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이미 서두부터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챘을 것이다. 하지만 <빅 아이즈>는 논쟁적이지 않다.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조심스럽다. 평상시처럼 미국 문화의 키치적 습성들을 조롱하지만, 정작 키치 예술을 대량생산해낸 예술가에 대한 관점은 신중하다. 아마 실존 인물이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예술가 마가렛 킨을 배려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건 배려라기보다는 존경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빅 아이즈>속 슬픈 눈망울의 아이들을 이미 봤던 기억이 있다. 팀 버튼 감독의 애니메이션 <프랑켄위니> 혹은 <유령신부>의 주인공들을 떠올려 보자.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커다란 눈매에는 요상하게 슬픔이 어려 있다. 매혹적이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마가렛 킨의 ‘빅 아이즈’는 팀 버튼에게 아주 가까운 예술이었고, 늘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은 큰 눈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팀 버튼은 자신의 작품의 영감의 원천이 된 마가렛 킨에 대한 존경을 전한 바 있다. 그렇게 영화<빅 아이즈>는 팀 버튼의 B급 감성을 직조하는데 큰 영감을 주었던 감독 에드워드 우드 주니어에 대한 헌사를 바쳤던 <에드우드>에 이어, 실존했던 예술가에게 바치는 두 번째 헌사를 담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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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킨의 고소가 없었다면, 1950~6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월터 킨은 그림뿐만 아니라 포스터와 아트 상품을 겸하면서 대중미술의 상업화의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6년 부인인 마가렛 킨이 월터를 고소하면서 그림을 실제로 그린 사람이 마가렛 킨이라는 희대의 사기극의 전말이 드러났다. 마가렛 킨의 극적인 이야기는 여러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당연하게도 오랜 그녀의 팬을 자처한 팀 버튼 감독이었다. 마가렛 킨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팀 버튼은 이전에 보여주었던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는다. 우선 1996년 이후 단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는 그의 페르소나 조니 뎁과 헬레나 본헴 카터가 등장하지 않는 것부터가 새롭다. 그렇게 영화 <빅 아이즈>는 팀 버튼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가 되었다. 에이미 아담스와 크리스토프 왈츠라는 배우는 낯설어진 팀 버튼의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더한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이다. 당시 미국사회는 여권운동이 벌어지기 전 보수적인 남성중심의 사회였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물론, 예술가로서의 여성의 삶 자체도 온전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이혼을 경험한 마가렛 킨은 자신의 예술과 어린 딸, 두 가지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남편의 그늘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잊었던 그녀는 자신과 딸의 삶을 당당하게 지키기 위해 법정에 나선다. 아버지에 대한 헌사<빅 피쉬> 이후, <빅 아이즈>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팀 버튼은 마가렛 킨이라는 한 여인이자 어머니에 대한 판단을 최대한 유보하고, 예술가이자 딸을 가진 어머니로서의 마가렛의 삶 자체를 긴밀하게 들여다본다. 동시에 마치 자기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그렇다고<빅 아이즈>가 예술가의 전기를 다룬 평이한 드라마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팀 버튼은 비주류 감성을 가진 예술이 대중적 관심으로 주류가 되어가는 과정을 미국의 키치적 현상으로 보고, 대량복제의 시대로 넘어가는 대중예술의 생산 과정을 조롱하기도 한다. 대중적 성공에 도취된 월터 킨은 마가렛 킨에게 박람회를 위한 거대한 사이즈의 그림을 강제로 그리게 하는데, 영혼이 없는 이 그림은 줄곧 ‘빅 아이즈’를 하찮게 여겼던 뉴욕 타임즈의 미술평론가 존 케너데이에 의해 조롱된다. 영화는 줄곧 미술계의 홀대와 딕 놀란이라는 기자로 대변되는 언론의 호응 사이를 오가면서 진정한 예술의 가치가 무엇인지, 누구의 평가가 온전한 것인지를 되묻는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가렛 킨이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진열된 상품들 사이로 수북하게 쌓인 복제된 자신의 그림과 만나는 장면이다. 이 속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눈이 ‘빅 아이즈’가 되어있는 환영과 마주한다. 기괴하고 비일상적 감성을 가진 그녀의 작품이 시대의 감성으로 포장되어 가는 과정은 팀 버튼 영화답게 비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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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아이즈>는 그렇게 예술과 창작의 본질, 예술의 가치와 대중예술의 싸구려 감성에 대한 태도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을 남편에게 도둑질 당한 마가렛 킨의 실화는 예술의 대량생산과 판매라는 화두와 맞물려 과연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화자가 평론가 존 케너데이였다면 확연하게 달라졌을 영화의 화자가 가십전문기자였던 딕 놀란이라는 점은 <빅 아이즈>가 지향하는 주제의식과 맞닿아있다. 대중예술의 허상과 미디어라는 위선을 조롱하면서도 동시에 그림을 향한 마가렛의 열정, 딸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 속에서도 빛나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자부심이 마구 뒤섞인<빅 아이즈>는 고급예술과 키치를 오가는 팀 버튼의 영화답다. 다시 영화의 타이틀에 오롯이 담긴 앤디 워홀의 기이한 평가를 되짚어 보자. 그 말을 뒤집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훌륭한 것이 아니다.’가 된다. 과연 그런가에 대한 해답은 영화 속에는 없다. 그건 너희들이 찾아야지, 라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팀 버튼답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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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치 혀와 세 마디 손가락이라는 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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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정말 사실만 얘기할까? 사람들은 늘 거짓말을 하지만, 누군가가 한 말을 너무나 쉽게 사실로 믿어버린다. 특히 방송을 통해 전달된 이야기라면 혹은 언론인이 전하는 이야기라면 ‘공신력’이라는 포장까지 더해져 맹신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론은 참 쉽게 조작가능하다. 게다가 손쉽고 재빠르게 정보가 퍼져나가는 SNS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의 말은 깃털보다 가볍고, 총알 보다 더 빨리 전달된다. 반대로 누군가는 사실만을 이야기 하지만, 이미 오해는 불신이 되고, 언론은 SNS를 퍼 나르고 SNS는 그런 언론을 다시 인용하면서 오인된 채로 한 개인을 뒤흔들어 버린 마녀사냥은 끝나지도 않고, 해명되지도 않는다.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백설공주 살인사건>은 그렇게 무심코 툭 던져버린 말과 오해로 믿어버린 말, 그리고 무책임하게 퍼다 나르는 이야기들이 선량한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가해자가 우리 모두 일수 있다고 되짚어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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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백설공주 살인사건>은 SNS와 사람들의 구전으로 자꾸 왜곡되는 이야기 속 진실을 되짚어간다. ‘백설공주’라는 비누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미모의 여직원 노리코가 숨진 채 발견된다. 사건을 접한 TV 조연출 유지(아야노 고)는 비누 회사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며칠 째 연락두절인 회사 동료 시로노 미키(이노우에 마오)가 유력한 용의자 같다는 소식을 듣는다. 유지는 잠시라도 트위터 없이 살지 못하는 트위터리안이기도 하다. 유지는 피해 여성의 동료를 차례로 인터뷰하면서 미키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취재 내용을 실시간으로 트위터에 올린다. 인터뷰 내용은 자극적으로 편집되어 방송으로 나간다. 방송 직후 순식간에 일어나 미키의 실명과 고향, 출신학교가 까발려지는 등 일명 신상 털기가 시작된다. 모든 정황은 미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영화 <백설공주 살인사건>은 탄탄하고 치밀한 원작의 구성을 바탕으로 SNS를 통한 악성 댓글, 개인정보 유출, 사생활 침해 등이 난무하고 SNS가 기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현대 사회의 병폐를 드러낸다. 나카타 히데오의 <검은 물 밑에서>를 비롯한 각본으로 재능을 인정받고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등 원작을 구현하는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 재능은 자칫 다양한 복선과 등장인물로 어수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단정하게 재단한다.<백설공주 살인사건>은 유지가 한 번 툭 던진 말이 어떻게 변질되고 확장되면서 한 여인의 평범한 인생을 송두리째 왜곡시키는지, 그 과정을 농밀하게 들여다본다.

 

<백설공주 살인사건>의 이야기는 섬뜩하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현상과 다르지 않아 차가운 냉기를 전한다. 굳이 실명을 거론하지 않아도 종종 되풀이 되는 온라인상 마녀사냥의 여러 이야기들이 겹쳐 떠오른다. 일명 신상 털기가 진행되는 속도는 ‘지하철XX녀’, ‘무개념XX남’ 등의 동영상이 퍼지고 유통되는 속도만큼 빠르다.<백설공주 살인사건> 속에는 크게 두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미키를 기억하고, 미키와의 일화를 늘어놓는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네티즌이 그들이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실보다 자극적인 뒷담화에 열을 올리고 열광한다. 유지는 트위터를 통해 가십을 쏟아내고, 네티즌들은 순식간에 동조하는데, 요시히로 감독은 그 과정을 영화 화면에 트위터 창을 띄워 관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관객을 네티즌의 자리로 소환하면서, 세 마디 손가락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렇게 벌어진 마녀사냥의 끝, 익명의 가해자들 중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건은 또한 누구도 반성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오롯이 피해자만 남는다. 동시에 툭 던진 한 마디로 가해자가 된 나 역시, 언제든 되돌아온 부메랑에 맞아 골병이 드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일본판 <꽃보다 남자>를 통해 귀엽고 발랄한 매력으로 사랑받은 이노우에 마오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열등감에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못난이에서 내면이 아름답고 따뜻해서 호감을 주는 미키의 진짜 모습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이면서 <백설공주 살인사건>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아야노 고 역시 어눌하면서도 밉지 않은 허당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한다. 영화는 줄곧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오랜 기억 속 따뜻한 이야기로 기억되는 『빨강머리 앤』을 인용하면서 마오의 과거와 그녀의 친구의 과거를 현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이를 통해 오프라인에서 나를 끝까지 믿고 진심어린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가 가장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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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미나토 가나에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소설 『고백』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소설가이다. 초등학교 친구가 살해당한 뒤 남은 4명의 친구들의 이야기『속죄』, 자살을 꿈꾸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청춘소설 『소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서간체 소설『왕복서간』등 그녀의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서로 주고받은 상흔들이 영구히 한 사람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잔인할 정도로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미나토 가나에의 원작 『백설공주 살인사건』 번역본도 곧 출판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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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라는 이름의 독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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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럽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있었다. 암호 해독반에 근무하며, 독일군으로부터 유럽을 구해낸 그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앨런 튜링의 업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알려진 것은 영국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실수로 청산가리를 먹고 죽었다는 것 정도라고 한다. 대체 앨런 튜링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앤드루 호지스의 전기 『Alan Turing』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의 숨겨진 삶을 되짚으면서, 사회의 골 깊은 편견만큼 불가해하고, 폭력적인 것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유럽을 구했지만 조국에 의해 버려진 앨런 튜링의 아이러니한 삶을 다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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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승리로 이끌었던 암호문 이니그마를 해독하여,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이니그마 전담 암호 해독팀과 그 팀을 이끌었던 앨런 튜링에 대해 이야기한다. 24살에 캠브리지 대학 교수가 된 천재,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기계는 기계만이 이길 수 있다며 이니그마를 만들어내는 기계에 대적해 이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는 기계 ‘크리스토프’를 만든다. 암호 해독팀이 꾸려진 초반 멤버들은 앨런 튜링의 제안을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곧 그의 방법만이 유일하게 이니그마를 풀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힘을 모은다. 흔한 영웅담 같지만,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의 영웅담이 아닌, 비극적인 삶을 재현한다.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세기의 천재 앨런 튜링은 특별사면이 결정된 2013년까지, 실형을 받은 범죄자이기도 했다.

 

1951년 집 안에 강도가 든 한 남자가 경찰서에 신고를 하면서 시작된다. 집에 강도가 든 것은 사실이지만, 없어진 것은 없다는 이상한 입장을 고수하던 그를 형사는 조금 더 깊이 파헤쳐 간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앨런 튜링이 되어 괴팍한 천재의 전형을 보여준다. 실증에 근거한 자료를 극적으로 재해석한<이미테이션 게임>은 앨런 튜링의 괴벽과 기행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극적으로 재단한다. 튜링이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가진 기계를 인격체처럼 대하는 이유도, 그토록 기계와 소통하고 싶었던 이유도 서사적 구조 속에 잘 녹여낸다. 관객들은 대부분 앨런 튜링이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이미테이션 게임>은 색다른 미스터리를 선사하는데, 앨런 튜링의 숨겨진 과거와 흔들리는 정체성, 그리고 사회의 편견을 올곧게 극복하지 못하고 모함과 질시, 오해 속에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더욱 세밀하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모튼 틸덤 감독은 한 사람의 영웅 이야기로 치우치기 쉬운 전기 영화 속에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천재의 상처와 1950년대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던 사회의 분위기까지도 매끈하게 녹여낸다. 괴짜 천재 그 자체가 된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그의 조력자가 되어 균형을 맞춰준 키이라 나이틀리는 각각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주연,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모튼 틸덤 감독(사진 오른쪽)은 감독상 후보에 올라있으며 그 결과는 2월 22일에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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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을 칭송하지 않는다. 수많은 불면의 밤과 동료들과의 반목을 딛고서야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던 ‘크리스토퍼’와 앨런 튜링은 전쟁과 함께 지워진다. 기밀을 이유로 튜링의 복무 기록은 사라지고, 동시에 앨런 튜링이라는 인물도 지워버린다. 대신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범법자가 되어 버린 초라한 남자만이 남았다. 크리스토퍼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앨런은 감옥에 가는 대신 화학적 거세를 선택한다. 호르몬 주사로 동성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당시의 믿음 때문이다. 영화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앨런은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베어 물고 자살을 선택한다. 애플은 끝내 부인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 입 베어 문 사과라는 애플의 로고가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런 튜링’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은 여전히 믿어볼 만한 추측이다.

 

강한 어조로 강제하지 않지만, <이미테이션 게임>은 미화되지 않은 개인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면서 국가와 사회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과 그 속에 감춰진 진실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여기에 앨런 튜링의 정신적 애인인 조안 클라크의 삶을 배치하면서, 사회적 편견 때문에 꿈과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한 여성에 대해서도 들여다본다. 2009년 영국 정부는 튜링의 동성애 유죄판결에 대해 사과하고, 2013년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시행된 특별 사면으로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사회에 의해 희생된 개인의 명예를 정부가 다시 복원시켜주었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앨런 튜링과 조안 클라크에게 용기를 준 말을 우리도 기억하면서, 우리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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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콤비 캐릭터의 유연한 안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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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이미테이션 게임>, 그리고 흥행신화를 이어가는 <국제시장>과 맞붙었지만 역시 이변 없이 구정 연휴의 승자는<조선명탐정 : 사라진 놉의 딸>(이하 <조선명탐정>)이었다. 누적관객 300만을 돌파한<조선명탐정>은 명콤비의 탄생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김명민, 오달수의 생생한 캐릭터를 유연한 웃음 코드와 잘 녹여 많은 관객을 매료시켰다. 2010년 흥행작<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 이후 5년만이다. 당시 <각시투구꽃의 비밀>은 <평양성>, <헬로우 고스트> 등 쟁쟁한 경쟁작들과 겨뤄 최고의 흥행신화를 이뤄낸 작품이었다. 드라마 PD였던 김윤석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었고, 드라마에서의 인기와 달리 김명민은 영화계에서 딱히 흥행작으로 내세울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쉽게 예측되지 않았던 흥행 성공의 비법은 역설적으로 TV 시트콤 식의 치고 빠지는 캐릭터와 김명민이 무게감을 내려놓고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허당 캐릭터에 있었다.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은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김윤석 감독은 코믹하지만, 동시에 감정이입이 가능한 캐릭터를 잘 조리하는 감독이었다. 역시 잘난 척 하지만 속물인데다 허당인 양반 김민과 톰과 제리처럼 으르렁거리지만 결국 서로를 향하는 서필이라는 캐릭터를 꽤 탄탄하고 매력적인 콤비로 직조해 낸다. 넉살좋고 유쾌한 두 캐릭터는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2편이 만들어지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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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2015년의<조선명탐정>은 전작을 보지 않은 관객들도 유쾌하게 만족시키고, 또 다른 시리즈물이 나와도 좋겠다는 기대감을 준다는 점에서 그 목적에 충실한 오락영화다. 때는 정조 19년, 불량 은의 유통을 막은 공로를 세웠지만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외딴 섬에 유배된 명탐정 김민(김명민), 어느 날 단짝 서필(오달수)이 찾아와 사라진 줄 알았던 불량 은이 다시 나돌고 있음을 알린다. 사라진 동생을 찾아달라며 매일 김민을 찾아오던 소녀가 실종되면서 김민은 유배지를 이탈한다. 그런 그들의 앞에 의문의 여인 히사코(이연희)가 나타난다. 김민과 서필은 불량 은 유통사건과 사라진 소녀를 찾는 두 가지 미션을 수행하는데, 이 두 가지 사건에 연결고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4년 만에 재회한 김명민, 오달수 콤비의 호흡이 2편의 성공의 관건이었는데 마치 어제 본 연속극에 이어지는 것처럼 두 배우는 늙지도 않고, 한층 더 자연스러워졌다.

 

영화의 질감이나 느낌이 전편과 이어지는 것은 감독은 물론 주연배우, 그리고 참여 스태프들 대부분이 다시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지민의 뒤를 이어받은 이연희는 남모를 사연을 감춰둔 게이샤가 되어 홍일점으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선보인다. 물론 연기력 보다 앞서는 미모도 극의 흐름에 유연함을 더한다. 여기에 조연 황정민과 반전 캐릭터를 선보이는 조관우는 기대 이상의 연기로 이야기를 더욱 긴박하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 육지, 바다, 하늘을 종횡 무진하는 어드벤처 영화의 틀을 담아낸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보는 듯한 대규모의 세트와 조선판 행글라이더 비거의 등장이 박진감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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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명탐정>은 전작의 성공 모델과 이야기 구조를 고스란히 따른다. 이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어쩌면 가뿐히 건너뛰어야 할 함정이 될 수도 있었다. 김민과 서필이 조사하는 사건의 중심에 선 여자 주인공은 악녀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가 완벽하게 감춰지지 않는다. 대신 반전의 몫은 장님 악사로 강화했다. 탐정이라는 직함이 등장할 수 있었던 정조 무렵의 시대적 배경을 활용한 것은 시리즈의 연속성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긴박한 이야기를 직조하면서 몇 가지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김민이 왜 유배를 가게 되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극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전작의 호흡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조선명탐정>이 이뤄낸 성과는 훨씬 더 가치있다. 캐릭터가 살아있는 한국형 시리즈의 탄생이자, 프랜차이즈 영화로서의 시발점에 섰기 때문이다. 2편의 흥행성공으로 당연히 3편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점도 반가운 일이다. 단, 이토록 반가운 한국형 연작이 3부작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3편부터는 조금 달라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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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난 속살에 뿌린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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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크롤러’라는 단어는 우리에겐 많이 생소하다. 동명의 영화<나이트 크롤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신종 직업 ‘나이트 크롤러’는 한마디로 강력범죄 현장을 쫓는 파파라치 정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모두가 잠들었다고 생각되는 밤, 빠른 차와 고가의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경찰 무전을 훔쳐들으며 로스앤젤레스 일대를 누비는 이들은 차량 충돌, 화재, 살인, 각종 폭력 사건을 쫓고 촬영된 필름을 지역 TV 뉴스에 팔아넘긴다. 이들은 때론 경찰보다 빠르며 당연히 방송사 보다 늘 앞선다. 누구도 촬영하지 못한 영상을 선점한다면 더욱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다. 일종의 프리랜서로 활동하기에 자격도 검증도 필요 없어 나이트 크롤러의 세계는 치열한 경쟁 그 자체이다. 때문에 마치 피에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이들은 더욱 강력한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며 범죄 현장을 뒤쫓는다. 그리고 대중을 현혹시킬 자극적 특종에 집착하는 언론사(방송국)은 이들을 이용한다. 댄 길로이 감독의<나이트 크롤러>는 생소한 나이트 크롤러들의 생생한 현장을 보며주면서 동시에 부패한 언론의 속살과 그 맨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철조망과 맨홀 뚜껑 등을 몰래 훔쳐 파는 루이스 블룸(제이크 질렌할)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은 무슨 일도 최선을 다해 할 자신이 있다며 훔친 물건을 파는 사장에게 자신을 취직시켜달라고 하지만, 도둑놈을 쓸 수는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길을 운전하다 교통사고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그 영상을 방송국 보도팀에 팔아넘기는 일을 하는 일명 ‘나이트 크롤러’를 목격한다. 사건 현장을 촬영하는 것이 돈이 되는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된 루이스는 카메라와 경찰 무전 도청기를 구매하여 각종 사건, 사고 현장을 돌면서 ‘나이트 크롤러’가 된다. 한편 지역 방송국의 보도국장 니나(르네 루소)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자극적 영상을 여과하지 않고 내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늘 계약직 지원으로 방송국을 전전하던 니나는 재계약 시점을 앞두고 시청률에 더 신경을 쓴다. 그런 니나의 입맛에 맞는 자극적 영상을 제공하면서 동맹관계가 된 루이스와 니나는 더 선정적이고, 더 자극적인 특종에 열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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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레거시>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댄 길로이는 장편 데뷔작 <나이트 크롤러>를 통해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언론과 돈을 위해서는 도덕 같은 건 하찮게 여기는 한 인간의 모습을 파헤치며 타인의 목숨보다 자신의 삶과 성공에 더욱 집착하는 현대인의 폐부를 헤집는다. 그리고 붉게 드러난 상처에 소금을 뿌려, 관객들의 시선과 마음을 쓰리고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루이스 블룸이라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그런 괴물을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점을 성공적으로 화면에 담아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고에 놀라지 않는 루이스의 무감각은 자극적인 뉴스에 매일 노출되는 우리들 자신의 무감각과 다르지 않다. 솔직히 루이스 같은 나이트 크롤러를 양산하는 이면에 바른 정보를 전달한다는 언론의 윤리의식 대신, 자극적 영상으로 시청자들을 수동적 시청자로 만들어내는 저열한 언론의 상업성이 움트려있다. 수많은 매체들 사이에서 시청률 경쟁이라는 치열한 환경 속에서 누구도 언론의 윤리를 논하지 않는 시대에 서 있다. 이렇게 공감능력이 결여된 루이스의 모습을 보자면 이미 언론으로 제 역할을 못하는 한국의 현실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면서 씁쓸함을 안긴다. 게다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언론의 부패상은 막상 그 이면 속으로 파고들어 보면 상상이상으로 썩어있어 더 불쾌하고 더 충격적이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서는 2001년 브라질의 범죄 고발 프로그램에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 직접 살인을 지시한 제작자의 실화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나이트 크롤러>의 내용과 묘하게 겹친다. 실제로 브라질의 프로그램은 흉악 범죄 사건을 방송해 시청자들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지역 범죄율 하락에 공헌하기도 했다. 하지만 범죄율이 낮아지면서 함께 떨어진 것은 시청률이었다. 이에 제작자인 형제는 시청률을 위한 살인사건을 계획했다고 한다. 영화 <나이트 크롤러> 속 루이스 역시 카메라 앵글을 위해 시체의 위치를 바꾸거나, 살해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 범죄 현장을 신고하지 않고 범죄가 일어나길 기다린다. 소시오패스 역할을 위해 13kg을 감량, 성공에 목메는 광기어린 청년이 된 제이크 질렌할은 댄 길로이 감독의 각본에 반해 직접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범죄 현장이 더욱 자극적일수록 환희에 찬 미소를 짓거나 섬뜩한 눈빛으로 동료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 루이스에 완전히 동화된 제이크 길렌할은 초창기 영화 <도니 다코>에 필적할 만큼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관객들은 하나의 거대한 질문과 마주서게 된다. 과연 당신은 주목받지 못하는 지루한 진실과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거짓 중 무엇을 원하는가? 어쩌면 ‘나이트 크롤러’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당신 자신은 아닌가? 그리고 아마 그 누구도 묵직한 이 화두에서 명료하게 달아나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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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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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책장 한 귀퉁이에 꽂혀 있던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집을 꺼냈다. 그의 동명시집 속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절망 속 희망일수도, 희망 없는 절망의 나락일 수도 있는 시구처럼 마지막 장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결이 다르게 읽힐 것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버드맨>얘기다.

 

한때<버드맨> 시리즈로 영광을 누렸던 주인공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전직’ 슈퍼 히어로라는 수식어에 갇힌 채 노쇠해져 버렸다. 진정한 연기자로 인정받으면서 재기하고 싶은 리건은 할리우드 영화로 돌아가는 대신 브로드웨이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가 않다. 극단은 늘 재정난에 시달리고, 캐스팅된 배우는 마땅치 않다. 게다가 공연 직전 교체된 남자 주인공(에드워드 노튼)은 제멋대로라 통제 불능이며, 리건의 매니저이자 딸(엠마 스톤)은 약물중독에 매사가 불만스럽다. 자기 생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연극을 준비하면서 리건은 버드맨의 환청과 환영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애인은 임신한 것 같다고 하고, 이혼한 전처와 친구이자 제작자, 그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비평가는 리건의 주위를 맴돌면서 서서히 그의 내면과 갈등을 폭발시킨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이를 위해 리건의 심리를 내밀하게 쫓기보다 리건의 움직임에 따라 유영하는 장면들 속에 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을 계속 등퇴장시키면서 그의 목을 조르는 주변 인물과 그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리건이 느끼는 강박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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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잘 알려진 <21그램><비우티풀>을 통해 삶과 죽음 사이의 철학적 사유를 녹여내며 거장의 반열로 접어든 알레한드로 감독은 <버드맨>을 통해 그 명성을 깊게 뿌리내렸다. 리건의 숨통을 조여 오는 삶의 무게와 과거의 환영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알레한드로 감독은 웜홀처럼 관객들의 시선을 고정시켜 버린 롱테이크 장면으로 주목받은<그래비티>의 엠마누엘 루베스키를 촬영감독으로 택했다. 엠마누엘 촬영감독은 <버드맨>이 마치 원 신 원 테이크로 촬영된 것 같은 기법을 선보인다. 씬과 씬이 자연스럽고 세밀하게 이어져 있어, 언제 컷이 나뉘는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이를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심장이 쿵 떨어져 내면의 분열을 겪게 되는 정통비극의 주인공 그 자체인 리건과 함께 관객들은 숨통을 조이는 압박감을 함께 체험한다. 마치 카메라가 리건의 호흡을 그대로 이어받아 숨 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연출과 촬영 기법은 비로소 리건이 진정한 버드맨이 되는 순간 관객들도 함께 해방감을 느끼게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가장 화려한 도시 뉴욕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는 줄곧 폐쇄적인 극장 공간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매우 답답하다. 정말 버드맨이 된 것처럼 새의 시선으로 뉴욕을 누비는 화려한 장면과 그 쾌감을 배가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주인공 마이클 키튼의 캐스팅은 신의 한 수라 할 만큼 성공적이다. 영화 속 히어로 물 <버드맨>을 통해 우리는 20년 전 마이클 키튼이 주인공이었던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게다가 영웅이라기에 마이클 키튼은 너무 노쇠해져 버렸다. 마이클 키튼은 리건의 신경병적인 몸짓을 따르며, 벗겨진 머리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중년의 몸을 드러내면서 불운과 불행, 연민과 동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스티븐 호킹 역할을 맡아 보여준 빼어난 연기로 에디 레드메인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의 연기가 최고였다고 박수를 쳐주고 싶다.

 

리건이 세계적인 극작가 레이먼드 카버에게 연기를 잘 봤다는 메모를 받은 후 연극을 동경해 왔고, 수십 년 간 냅킨을 소중히 아껴온 것처럼 사람들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서야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료 배우와 평론가에게 냅킨의 가치를 무시당하고 리건은 한없이 무너져버리는데, 유튜브 동영상과 트위터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은 다시 리건을 향한다. 여기에 ‘좋아요’의 숫자를 통해 자존감을 느끼는 SNS 중독에 빠진 우리의 모습도 투영된다. 그렇게 <버드맨>을 보자면 점점 자신의 꿈과 멀어지고, 먹먹한 현실의 벽 앞에 훌훌 날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 겹친다. 영웅을 연기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리건처럼 우리에게도 ‘버드맨’ 같은 영웅이 되어 훨훨 날아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버드맨>을 통해 우리는 이미 너무 노쇠해져 버린 우리 아버지, 혹은 점점 꿈에서 멀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 혹은 미래를 묵도하게 된다. 그렇게 <버드맨>은 낭만적 관조도 복고의 기억상실도 아닌 지금 바로 현실 속 리건의 삶을 통해 꿈을 향해 한때 날개 짓을 했지만, 지금은 추락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경험은 씁쓸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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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님 말고 내던진 칼날이 향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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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1
A는 B의 최근 소식을 상세히 알고 있다. B랑 언제 그렇게 연락을 하고 지냈냐는 질문에 A는 심드렁하게 말한다. 만난 적 없어. 페이스북에서 봤어.

 

에피소드 2
짜증나는 전 직장 상사가 아직도 후배들을 괴롭힌다는 소식에 친구공개로 비난의 글을 올렸다. 팔로워도 아닌 직장 동료가 뜬금없이 따진다. 왜 자기 욕을 하냐며…….

 

에피소드 3
모르는 사람에게 친구신청이 들어온다. 직업, 학교, 친구, 가족관계, 나와 함께 아는 친구 숫자. 승인을 할지 보류할지 결정하는데 채 3분도 걸리지 않는다.  

 

앞선 일화는 개인적 일화이면서 꽤 보편적인 일화일 것이다. 친구들을 앞에 두고도 SNS에 몰두하고, SNS 친구가 진짜 친구인 냥 착각하고, ‘좋아요’ 숫자가 인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SNS를 떠나 사회적 관계를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SNS는 꽤 손쉽게 사람들 사이를 이어준다. ‘친구’를 맺은 사람과 그의 친구의 친구까지 실타래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반면 SNS는 일방적으로 친구 맺기를 거절하거나, 친구를 끊어낼 수 있는 지극히 배타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SNS를 통해 또 다른 사회를 구성하고, 또 다른 친구를 사귀고, 그 속에 또 다른 나의 집을 짓는다. 이 대화에는 입이 필요 없다. 모두 손가락으로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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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재 감독의<소셜포비아>는 21세기, 지금 우리의 현실과 가장 밀착된 SNS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다. 가장 뜨겁고 이슈가 될 만한 소재지만,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뻔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이를 매끈하게 뛰어넘기 위해 홍석재 감독은 SNS라는 가상세계에 빠진 사람들이 특이한 일부가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어두컴컴한 피씨방이 아니라,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곳은 젊은이들이 사회라는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칼을 가는 대학 강의실과 노량진 학원가이다. 탈영병의 자살 뉴스에 레나(하윤경)는 무심하게 악플을 단다. 그녀의 악플에 분노한 네티즌들은 아이디를 추적하여 레나의 신상을 턴다. 일부 네티즌은 현피 원정대에 참가하여 레나의 집을 찾아가고, 그 과정은 인터넷으로 생중계된다. 호기롭게 찾아간 현피 원정대를 맞이한 것은 목을 맨 레나의 시체다. 현피 원정대는 역으로 자살을 종용한 집단으로 낙인찍혀 다시 네티즌들에게 포위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레나의 죽음에 얽힌 실체다. 전쟁 같은 댓글의 소동 속에 밝혀진 레나의 정체는 충격적이다. 동시에 나와 늘 함께 하던 친구조차 믿을 수가 없다.

 

<소셜포비아>는 인터넷 문화를 넘어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스마트폰을 통해 창조된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직조된 신세계를 보여주고, 눈과 머리는 가상세계에 두고 있지만 두 발은 처참한 현실에 깊이 박힌 젊은이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인터넷 카페나 SNS에서는 근사한 이름의 아이디를 가지고 마치 보스처럼 군림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텅 비어있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이 살아가는 풍경은 스산하기만 하다. 이를 통해 우리가 만든 가상의 신세계 역시도 우리 현실과 꼭 닮은 전쟁터란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현실과 달리, 가상의 세계에서는 폭탄을 툭 던져 놓고, ‘아님 말고’라는 태도로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가해자는 있지만 그 실체가 없는 유령의 도시인 셈이다.

 

<소셜포비아>가 던지는 묵직한 성찰과 두려움은 이미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의 역사를 되짚어 가자. 아이러브스쿨과 싸이월드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옮겨가는 사이, 우리는 포맷과 리셋을 통해 과거를 지우고 매끈하게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했다. 진짜 친구들로 시작했던 소셜의 관계는 어느 순간, 가상의 페친으로 변했다. 문제는 심드렁하게 좋아요를 눌러대는 그와 내가 나눈 대화의 실체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데 있다. <소셜포비아> 속 주인공들은 취업의 불안과 그로 인한 분노를 SNS를 통해 배설한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는 친구의 정체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진정한 공포가 되어 돌아온다.

 

SNS의 자판을 따르면 한글로 ‘눈’이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SNS의 실체를 반영한다. 직접 눈을 마주하고 얘기할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은 모두 현실과 유리된 도피다. 그 도피 속에 똬리 튼 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친구 혹은 내 속에 움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영화의 제목인 ‘소셜포비아’는 사회적이란 뜻의 ‘소셜’과 공포증이란 뜻의 ‘포비아’가 합쳐진 단어로, 사람들 앞에서 불안을 경험한 후 사회적 상황을 회피하고 사회적 기능이 저하된 정신과적 질환의 이름이다. 더불어 익명성 뒤에 감춰진 폭력이 현실의 물리적 폭력으로 발전하는 그 전환을 통해, 익명의 마녀사냥이 오락적 유희로 전락하는 가운데 둔감해지는 죄의식은 서슬 퍼런 칼날처럼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소셜포비아>는 바로 그 한가운데로 관객들을 밀어 넣는다. ‘아님 말고’라며 허공을 향해 내던진 칼날이 부메랑이 되어 내 눈앞으로 되돌아오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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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이고 거친 박동의 오르가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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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숭고함? 예술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솔직히 알란 파커의<페임> 속 낭만은 영화 속 얘기다. 오직 한 길만 걸어와 다른 걸 선택할 방법도 모른 체 너무 빨리 미래가 결정된 아이들은 늘 친구와 경쟁해야 한다. 오디션을 통해 주연과 조연이 결정되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과 승리, 패배와 좌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한다. 그러니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예술의 미래를 논하는 낭만이 오갈 틈이 없다. 그건 흡사 즐길 수 없는 방석 게임 같다. 숫자가 줄어드는 방석에 매끈하게 안착하느냐, 잉여가 되어 그어진 선 밖으로 밀려나느냐 결정되는 싸움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치열하고 빨리 그리고 자주 벌어진다. 그런 점에서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위플래쉬>는 적나라하게 이 방석 게임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민낯을 드러낸다. 성공에 매달리는 학생과 완벽함을 위해 제자들을 소품으로 쓰고 마는 스승의 광적 집착은 거칠고 노골적이다. 그러니 스승이 열정적인 제자를 이끌고, 예술의 숭고함을 가르쳐 서로 화합하는 흐뭇한 결말에 이르리란 기대는 애초에 접는 것이 좋다.

 

어릴 때부터 최고의 드러머가 되겠다는 목표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앤드류(마일스  텔러)는 명문 음악학교에 입학하지만, 혹독한 연습에도 딱히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과 주위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냉대에 맞서야 한다. 어느 날 최고 실력가이자 독재자에 가까운 플레처(J.K. 시몬스)의 눈에 들어 재즈 밴드에 합류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플레처는 인격 모독은 기본,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입만 열면 무자비한 독설을 쏟아내는 플레처에게 학생들은 그저 자신의 음악의 앙상블을 완전하게 이뤄주는 부속품에 불과하다. 그렇게 플레처의 냉정한 교육 방식은 앤드류를 광적 집착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선댄스가 발굴한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두 주인공의 대립 관계를 명확하게 구축하면서, 음악영화를 피 튀기는 액션 활극 못지않게 박진감 넘치게 만들어낸다. 1985년생, 겨우 30세를 넘긴 데미엔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쓴 <위플래쉬> 대본으로 주목받았지만, 이렇다 할 연출 작품이 없었던 터라 직접 연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시나리오의 일부를 이용해 동명의 18분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2013년 선댄스 영화제 단편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자연스럽게 장편의 영화화도 이뤄졌다. 19일의 촬영과 10주의 후반작업을 통해 제작비를 아꼈고, 2014년 선댄스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여하면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렇게 탄생한 <위플래쉬>는 숨고르기를 하거나  멈칫하는 법이 없다. 마치 재즈 음악의 자유분방함과 극적 고조를 이야기 속에 녹여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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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는 시종 팽팽하고 날카로운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앤드류라는 인물의 정서에 관객들이 동화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을 만들어 놓는다. 순수한 사랑에 눈뜬 청년, 성공을 갈망하는 학생,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아직 너무 어려 저지르는 치기어린 실수 등 앤드류의 시선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래서 카메라는 줄곧 밴드에서 일어나는 갖은 사건들 속에서 앤드류가 경험하는 경쟁, 긴장감, 열패감 등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쫓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앤드류의 설렘과 겪게 되는 모멸감, 피가 날 정도로 연습에 몰두하는 열정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과정을 겪는다. 교통사고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드럼 스틱을 찾아 무대에 선 앤드류의 모습은 비정상적이지만, 관객들은 그의 열정에 이미 충분히 공감하고 있어 설렌다. 눈치 빠른 관객이거나, 영화가 너무 좋아 두 번쯤 본 관객이라면 눈치 챘겠지만, 모든 씬과 테이크 마다 앤드류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한 번도 없다.

 

액션 활극 못지않다고 한 것처럼 <위플래쉬>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선혈이 낭자하는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찢어진 피부와 얼음 물 속으로 퍼져가는 피는 관객들을 흥분시키는 요소가 된다. 피를 보고도 멈추지 않는 앤드류의 열정은 관객들의 정서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심하기만 하던 앤드류가 플레처와 닮아가는 과정은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뇌관처럼 아슬아슬하다. 영화의 소재로 전면에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던 드럼의 환상적인 연주 장면과 재즈 앙상블 연습 장면은 관객들의 심박수를 더욱 가쁘게 요동치게 만든다. 자신의 큐를 따르라고 윽박지르면서 연주자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던 절대 권력자 플레처에 맞서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이제는 자신의 큐를 따르라고 소리치고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재능이 생긴 앤드류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 도달하는 플레처와 앤드류 사이의 관계와 묘한 리듬이 쏟아내는 화력은 거의 오르가즘에 가깝다.

 

오직 뛰어난 연주와 빼어난 연주자만 살아남는다는 냉혹한 현실 속에 선배도 동료도, 심지어 자기 자신, 애인, 가족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할 유일한 것은 살아남아 최고가 되는 것이다. 이기적이지만 누구도 비난할 수 없어 숭고하게 느껴지는 그 욕심이<위플래쉬>가 들여다보고 싶은 예술가의 민낯이다. 그래서 앤드류가 어느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밴드의 중심으로 만들어 버리는 엔딩 장면은 큰 감동이 되어 심장을 때린다. 위플래쉬 단어의 원뜻처럼 심장을 채찍질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 속 드럼 연주는 앤드류 역할의 마일즈 텔러가 직접 했고, J.K. 시몬스의 아카데미 수상은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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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기품있게 착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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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비틀어 새롭게 보기가 일종의 트렌드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언제나 신선한 것만은 아니다. 비틀기의 신선함도 잠시, 점점 꼬이는 이야기와 점점 더 강해지는 이야기 사이에서 ‘새로움에의 강요’는 피로함을 누적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취향은 가지각색이다. 클래식의 우아함과 규칙성을 좋아해, 얼마나 원작에 더 가까운지로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점에서 케네스 브래너의 신작<신데렐라>는 고전적 우아함과 변함없는 가치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더욱 만족시켜주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헷갈리기 시작한다. 대체 <신데렐라>의 원작을 무엇으로 봐야하는가? 1697년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원작으로 알려진 <신데렐라>이야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맞다. 반면 그림형제의 ‘유혈이 낭자하는’ 잔혹한 <신데렐라> 버전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오페라 버전만 6개, 드류 베리모어가 적극적인 신데렐라로 변신한 1998년의 <에버 애프터>등을 포함 영화, 드라마 버전도 십여 개가 넘는다. 스핀 오프 형태로 모티브를 따온 영화, 드라마로만 따지자면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리지날일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신데렐라> 이야기가 우리 기억의 원판, 오리지날일 것이다. 당연히 세계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1950년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신데렐라>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디즈니, 21세기의 클래식을 꿈꾸다

 

디즈니는 이미 65년 전에 20세기를 대표하는<신데렐라>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와 계모, 왕자와 쥐, 그리고 요정의 이미지는 모두 디즈니의 것이다. 샤를 페로의 원작 동화보다 디즈니의 그림책이 우리에겐 더욱 친숙하다. 그리고 자그마치 65년 만에 디즈니는 <신데렐라>를 실사판으로 만들었다. 과연 얼마나 새로울지, 얼마나 많은 기술력이 동원되었을지 사람들이 기대에 들떠하는 사이, 디즈니의 고민은 기술이 아니라 클래식한 원전 그 자체에 있다는 듯 정공법을 택한다. 1989년 슬픈 원작동화를 발랄한 해피 엔딩으로 바꾸면서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역사를 썼던<인어공주>과 정반대의 노선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디즈니는 톡 쏘는 청량감 대신 오래 묵어 풍부하고 향이 진한 와인 같은<신데렐라>를 만들어낸다. 애니메이션의 강렬한 기억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진 않겠지만, 2015년의 <신데렐라>가 실사판 신데렐라 이야기의 클래식이 될 거란 디즈니의 자부심은 곳곳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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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아한 자신감을 실현 시킨 것은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다. 명문 로얄 연극아카데미 출신으로 그 자신이 셰익스피어 극에 정통한 배우이면서 <헨리 5세>, <헛소동>, <오텔로>, <햄릿> 등 여러 편의 셰익스피어 원작을 연출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그는 소란스럽지만 기품을 잃지 않는 영국식 이야기의 우아함을 선보인 바 있다. 2015년 <신데렐라>는 원작의 정서를 살리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 케네스 브래너 감독 특유의 섬세함을 이식받는 작품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데렐라의 이미지 그대로 영화 속 신데렐라는 착하고 선한 마음씨를 가지고, 계모와 언니들의 학대에고 굴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한 마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살라는 생모의 유언을 깊이 품고 따뜻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폭발하지는 않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낼 줄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못되고 조금 덜 떨어진 언니들인 아나스타샤와 드리젤라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1세기 <신데렐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계모이다. 뭔가 새로운 것이 없었다면 케이트 블란쳇이란 배우를 기용하지도 않았겠지만, 케네스 브래너는 사악한 계모의 내면에 조금은 풍성한 결을 새겨 넣었다. 여전히 허영심 강하고 악랄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은 자신의 캐릭터에 ‘생존’에의 갈망과 ‘젊음에 대한 질투’, 그리고 끝내 남편과 의붓딸의 ‘마음’을 얻지 못한 허전함까지 품어낸다. 여기에 세계적인 프로덕션 디자이너 단테 페레티가 가세해 만들어낸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신데렐라>의 또 다른 캐릭터가 된다. 또한 실컷 이용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졌음에도 자제할 줄 아는 케네스 브래너의 연출력은 <신데렐라>의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한다. 동거하는 쥐들은 최소한의 움직임만 주어 CG인지 실사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마무리하고, 요정이 나타나 마법을 부리는 순간에는 아껴둔 기술력을 모두 쏟아 붇는 식이다. 그렇게 탄생한 신델레라의 변신 장면은 모두의 기대를 만족시키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환상적이다.

 

<신데렐라>는 복고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쉬운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고전 작품이 지닌 경건하고 우아한 가치와 그 품격을 과시하고 드러낸다. 너무나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여전히 익숙한 방식으로 풀어가지만, 그 속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과 로맨스가 있다. 용기와 따뜻한 마음이 가지는 선량한 힘이 마법처럼 중요하다는 이야기 때문에 낯 뜨겁거나 질리는 순간이 찾아올 법도 한데, <신데렐라>는 우아함과 어느 순간에도 잃지 않는 기품으로 그런 순간들을 매끈하게 걷어낸다. 어쩌면 있으리라 기대했던 반전이 끝내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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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개 인생을 책임지라는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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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특히 정 많고 사랑이 넘치는 개들이 반려동물 중 특히 인기가 있다. 반려견을 위한 케이블 TV도 있고, 반려견 행동전문가가 교육방법을 알려주는 TV 프로그램도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에 <삼시 세끼 어촌편>을 통해 한 뼘도 되지 않는 강아지 ‘산체’ 덕분에 장모 치와와는 없어서 구하지 못하는 품종이 되었다. 대형 마트에는 반려동물 전용샵과 병원이 갖춰진지 오래다. 하지만 반려견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과 비례해 버려지는 개의 수와 학대도 급증하고 있다. 몇 해 전 TV 예능 <1박 2일>을 통해 인기를 누렸던 ‘상근이’ 덕분에 그레이트 피레니즈 종은 품귀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딱 1년 뒤 유기견 보호소에서 자주 발견되는 품종은 그레이트 피레니즈 종이었다 한다.

 

귀여운 모습에 충동적으로 입양하지만, 강아지가 문제없이 가족이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배변을 못 가릴 수도 있고 시도 때도 없이 인간의 음식을 탐하거나, 인간의 물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다. 사랑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이 모든 과정은 서로에게 고통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여전히 온갖 나쁜 욕설에는 ‘개’를 집어넣고, ‘개보다 못한’이란 표현을 쓰면서 개를 하찮고 천박한 동물로 인식하는 등 여전히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다. ‘애완동물’이란 용어를 ‘반려동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이유는 동물이 인간의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상생해야한다는 자각과 변화가 필요해서 인데, 막상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엄과 책임감을 지니기에 인간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헝가리 영화<화이트 갓>은 그런 인간의 이기심과 차별에 대한 잔인한 우화이자 경고이다. 헝가리 순종견이 아닌 잡종견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 이후, 부다페스트 거리는 버려진 개들의 세상이 된다. 잡종견에 벌금을 무는 정부나 돈 때문에 키우던 개를 버리는 사람들이나 몰인정하고 잔인하긴 마찬가지다. 버려진 개들을 이용해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개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인식은 없다. 마치 모든 생명의 통치자처럼 구는 인간들을 향해 <화이트 갓>은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한다. 수백 마리 개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들을 습격하고 텅 빈 부다페스트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애잔하다. 하지만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은 개를 의인화하지도, 마냥 인간들에게 복종하는 선량한 마음을 가진 존재로 그리지도 않는다. <화이트 갓>속 유기견들은 개를 개 같이 대하는 개 같은 인간들에게 처참하게 복수한다. 코르넬 감독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꽤 상세하게 ‘개 같은 인간’ 들의 작태를 그려내기에, 개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인간이 겪는 비극이 아니라 자업자득처럼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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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익을 위해 쉽게 개를 버리고, 차별하는 인간들에 대한 개들의 반란이랄까. 인간이란 울타리를 벗어난 동물에게 세상은 정글보다 더 가혹하다. 버림받는 순간, 모든 것이 생존의 문제가 된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개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사람들의 폭력에 맞서야 한다는 것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화이트 갓><혹성탈출>의 개 버전이라 부르지만, <화이트 갓>의 시작과 태생은 할리우드식의 상업영화와 꽤 먼 거리에 있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개들의 반란이라는 소재만 놓고 보면 컴퓨터 그래픽부터 떠올리겠지만,<화이트 갓>은 예측 가능한 것들에서 벗어나 낯선 얼굴로 가다온다. 개들의 동작과 표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디지털 기술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화면에 들어오는 것은 버려진 개들이 가진, 날 것 그대로의 움직임과 표정이다. 그래서 내가 걸어가는 길, 골목에서 불쑥 분노한 개들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현실감을 품어낸다. 한 마디로 개들의 야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면서 인간과 개가 행복하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마음이 더 따뜻해지고 조금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까지 담아낸다.

 

당연하게도<화이트 갓>의 가장 중요한 배역은 ‘개’이다. 특히 연기가 뛰어난 개에게 수여하는 ‘팜도그 대상’에 빛나는 개 ‘하겐’은 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  코르넬 감독은 하겐을 통해서 버려진 개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스크린에 녹여낸다. 주인공 소녀 릴리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헝가리의 정책과 아버지의 반대로 하겐을 길에 버리고 돌아온다. 그 순간부터 영화의 끝까지 하겐이 변하는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의 시작, 소녀와 함께 뛰어놀면서 장난스럽던 표정은 사라지고, 날선 경계와 분노가 더해져 공격성은 더욱 강해진다. 영화에 참여한 250여 마리의 개들이 모두 유기견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그래서 그들이 겪었을 분노와 고독, 슬픔과 절망의 감정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났는지도 모르겠다.

 

<화이트 갓>은 세상의 모든 애견인들이 봐야 하는 영화라는 홍보 문구를 사용한 적이 있다. 정말 개를 사랑하는 ‘애견인’이라면 굳이 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약자들을 괴롭히고,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생명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배려와 희생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삶을 나눌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강아지를 데려오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화이트 갓>의 제작진들은 유기견들의 안전을 최대한 고려하여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의 개봉 이후 250여 마리의 유기견들이 새로운 가족을 찾아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문제는 영화 속 유기견에 대한 차별과 잔인한 태도가 먼 헝가리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대략 하루 평균 300 마리의 개들이 버려진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아! 우리 주위의 개들의 인생을 ‘개 같은 인생’으로 만들지 말자는 날선 교훈만은 잊지 말자.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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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친 사랑의 거리, 그 쓸쓸함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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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 날의 날씨, 그 날의 감정, 그리고 그 날의 냄새. 하지만 가끔 그 날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날의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같은 일을 겪었지만, 각기 다른 기억과 감정을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리워지는 기억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때는 서로가 세상의 모든 것 같았던 코너(제임스 맥어보이)와 엘리노어(제시카 차스테인)는 뜨거운 사랑을 했다. 이어, 거친 숨소리로 자살을 시도하는 엘리노어. 평범하지만 행복했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잔잔한 사랑이야기로 시작해서, 급변하는 이야기의 정서는 그렇게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의 이야기를 관통한다. 갑작스런 변화 속에서 엘리노어는 무작정 달아나고, 코너는 그녀를 쫓지만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교차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겪은 깊은 상처가 드러낼 즈음, 서로는 느낀다. 함께 겪은 사건을 극복하는 다른 태도와 기억 때문에 두 사람은 점점 더 먼 길로 따로 걸어가고, 서로의 행동을 품어내지 못한다.  네드 벤슨 감독의 데뷔작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한 일종의 3부작의 마지막 버전이다. 앞선 두 편의 영화를 나란히 두고 본다면 훨씬 더 이해의 깊이가 넓어지겠지만, 상실을 극복하는 다른 방법 때문에 결국 나란히 걷지 못하는 두 남녀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는 마지막 편에도 오롯이 담겼다.

 

영화는 엘리노어와 코너가 식당에서 돈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신발을 벗고 도망갈 준비를 마친 엘리노어는 코너에게 눈치껏 따라오라고 속삭이며 달아난다. 그리고 비극을 맞이한 두 사람 중 엘리노어는 첫 장면처럼 늘 먼저 달아나고  코너는 그녀를 뒤쫓는다. 사랑할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함께 달렸던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은 늘 어긋난다는 것이다. 늘 앞서가거나, 뒤에서 따라가거나 스쳐갈 뿐, 같은 길을 걷지 못한다. 포스터가 전달하는 이미지와 달리 <엘리노어 릭비>는 애잔한 사랑을 그리는 멜로 영화가 아니다.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속에 지긋지긋하지만 끝내 구심점이 되어 그 곁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코너와 엘리노어 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낸다. 이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애잔한 기억은 편린처럼 떠돌지만, 역시 함께 나눈 기억은 다시 쓸쓸하고 아픈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 상대방의 따뜻한 심장이 아니라, 계속 되짚어가야 하는 나의 기억이라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그래서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공허하다. 각자의 기억이 달라 명쾌한 처방이 없는 상실의 아픔은 먹먹한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생존법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은 교차점 없이 점점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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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드 벤슨 감독은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다른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각각의 사람이 상처를 극복해 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코너는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으로 상처를 극복하려하고, 릭비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 릭비는 코너의 일상성이 서운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릭비의 모습을 코너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것이라 이해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면서, 스스로 외면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같은 시간 동안 사랑했지만, 서로 다른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남녀의 시선을 꽤 고르고 균등하게 보여주며, 두 사람의 행동을 옹호하지도 편을 들지도 않는다.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행동하는 두 사람을 통해 관객들은 결국 제 자리로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열을 함께 겪는다. <어톤먼트><비커밍제인> 등의 로맨스 영화의 풋풋한 청년에서 깊은 슬픔을 간직한 남자로도 잘 어울리는 제임스 맥어보이는 과장된 표정 없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로 애잔한 진심을 전한다. 우리에겐 <인터스텔라>로 기억되는 제시카 차스테인은 대기만성형 여배우로서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자벨 위페르와 윌리엄 허트 등 연기파 배우들이 든든하게 또 다른 상실을 극복하는 가족의 한 축을 연기한다. 아주 소수의 극장이긴 하지만,<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의 버전도 함께 볼 수 있다.

 

영화의 중반부 쯤 엘리노어 릭비는 거리를 걷는데, 그녀의 뒤로 그라피티가 비친다. 무심한 듯 지나치다가, 마치 같이 바라보라는 듯 그녀는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그 그라피티는 마치 영화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이 영화의 숨겨진 상징이기도 하다.

 

 Love isn’t missed by minutes. It’s missed by miles
 사랑은 시간이 아니라, 거리 차로 놓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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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반전, 오차 없는 감동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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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을수록 관람하기 좋습니다.

 

결말이 알려지거나,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을 담았을 때 리뷰 앞에 경고 문구를 붙이곤 한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써 보았다. 이유는 말 그대로다. <장수상회>는 기대 없이,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강제규 감독이 만든 황혼 로맨스라니 궁금하군, 하는 마음으로 봐야 하는 영화다. 반전이 유출되었다고 영화의 재미와 감동이 딱히 줄어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번 칼럼에서 그 제목을 밝히진 않겠지만 영화의 원안이 되었던 영화를 이미 보았고, 영화 ‘좀’ 본 관계로 초반부에 영화 속에 숨겨진 비밀을 ‘완전’ 눈치 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울어야 할 곳에서 백퍼센트 울었고, 웃어야 할 곳에서는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강제규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감정’은 오롯이, 오차 없이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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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감독 4년만의 복귀작이 황혼 로맨스라니 의아해하는 반응들이 많았다. 하지만  1996년 <은행나무침대>는 전생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가슴 아픈 멜로 SF 영화였고, 1999년<쉬리>는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는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첩보 액션물이다. 새로운 장르 속에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성을 담아내어 감동과 재미를 함께 전달하는데 탁월함을 보여준 강제규 감독은 2004년 남북관계 속에 가족의 이야기를 녹여내며 <태극기 휘날리며>로 천만관객을 동원, 자신이 세운 흥행기록을 갱신했다. 하지만 2011년 <마이 웨이>는 승승장구하던 그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사실, 한국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스펙터클을 보여준 영화이긴 했다. 문제는 드라마였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그의 스타일이 빤히 보이는 것이 함정이 되었다. 그런 그가 잔잔한 단편영화 <민우씨 오는 날> 이후, 황혼 로맨스를 그린 영화 <장수상회>로 돌아왔다. 얼핏 강제규 감독의 스타일은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영화의 장르는 바뀌었지만, ‘보편적 감수성’을 요리조리 배치하여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그의 영민한 연출 스타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로맨스 가족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장수상회>는 전혀 순진하지 않은, 아주 영리한 상업영화이다.

 

알려진 것처럼(사실 표면적으로) <장수상회>는 까칠한 고집불통 독거노인 성칠과 이웃집 자상한 할머니 금님의 황혼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여기에 마을 재개발의 유일한 걸림돌 성칠을 설득하기 위한 이웃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치한다. 성칠의 금님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지만, 금님의 의도가 순수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복선은 영화의 전반을 불안하게 떠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어수선하지 않고, 각기 다른 이야기의 축들이 꼼꼼하게 설계되었다. 노련한 연출에 세련된 연기가 더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반전에 앞서 훨씬 더 마음이 짠하게 흔들리는 것은 이야기의 중심에 단단하게 선 박근형과 윤여정 덕분이다. 특히 주로 품위 있는 회장님 연기를 보여준 박근형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깐깐한 독거노인 연기나 소녀감성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윤여정이 보여주는 케미는 너무나 귀여워 사랑스러울 정도다.  상업영화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할 토양은 없지만, 언제든 만개한 꽃을 피울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나라 중견배우들의 건재하고 알찬 연기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만족스럽다. 여기에 작은 역할이지만 충실하게 제 몫을 찾아 임하는 조진웅, 한지민, 황우슬예, 문가영, 그리고 엑소의 찬열 등 젊은 배우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어수선하지만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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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장수상회>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충격이 아닌, 감동으로 이어지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가족들이 함께 보아도 좋을, 따뜻한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영화이다. 웃고 싶을 만큼 웃고, 울고 싶을 만큼 울고, 받고 싶을 만큼의 감동을 받아나가면 된다. 그렇게 <장수상회>는 무겁지 않게 노인들의 이야기를 재바르게 품어내면서 달달한 중년 로맨스 영화의 몫을 다해 영화적 재미와 감동도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영리해서 정이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딱 울어야 할 순간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감정이 치사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노련하게 훈훈한 온기를 담아낸다. 하지만, 묵직하게 노인들의 삶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진 않는다. 영화 속 대사처럼 자식들은 가슴에 품어야 할 묵직한 돌덩이 같지만, 반대로 늙고 병든 노인은 당장에 가족들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인 것은 오늘의 현실이지만, 영화는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장수상회> 속 마을 공동체 모두가 함께 챙겨주는 노인의 삶은 판타지에 가깝다. 노인과 노인들이 겪는, 혹은 노인의 가족들이 겪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장수상회>는 애초에 사회문제를 담아내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마을 공동체 속 노인의 이야기는 어차피 로맨틱한 판타지로 설계되었다. <장수상회>는 이미 태생이 그런 영화다.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전하는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와 계산된 감동을 주는 대로 받으면 된다. 계량컵으로 정확하게 용량을 지켜 딱 그 맛이 나는 강제규 스타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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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은 결핍이 꾸는 꿈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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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 없이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그렇지 못했고 그 시절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뿐이다. 다만 지금은 그 지옥에서의 한 시절을 잊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도 변화도 없는 지옥의 한철 같은 사춘기를 겪는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토드 솔론즈, 1995) 속 대사다.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돈 위너는 학교에서는 왕따, 집에서도 무시당한다. 대부분의 성장영화들이 훌쩍 큰 주인공의 속내와 마음에 주목하고, 달라진 현실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일련의 소동을 겪은 후에도 돈의 생활은 한 치도 나아지지 않는다.

 

홀로 세상과 맞서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결말에 이르는 법 없이, 그 절망의 순간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을 생채기처럼 관객들의 마음에 새긴다.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의 <아리아> 역시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이야기다. 9살 소녀 아리아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엄마와 유명한 배우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개성 강한 두 언니 사이에서 아무런 존재감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의 사랑과 관심, 이해다. 하지만 가족들 누구도 아리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엄마와 아빠는 크게 싸워 따로 살게 되고, 아리아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서로에게 떠밀려 엄마와 아빠의 집을 오간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는 건 단짝친구 안젤리카와 들고양이 딕이다. 아리아는 자신을 봐달라고 계속 요구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지독한 현실에서 아리아는 끝내 달아나거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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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배우 출신의 영화감독 아시아 아르젠토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와 배우 다리아 니콜로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것처럼<아리아>에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깔려있다. 자식보다 자신의 일을 더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평범한 가정의 아이처럼 충분한 사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은 그런 자신의 경험과 어린 시절 모두가 겪어봤을 오해(incompresa : 영화의 원제)와 사랑받고 싶은 갈증을 아리아라는 소녀를 통해 그려낸다. 16mm 카메라를 통해 담아낸 화면의 질감은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아련하고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한다. 또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알록달록한 색감과 배경은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아리아의 황량한 내면과 그 결핍을 달래기 위한 상상이라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빈티지한 가구와 분위기 역시 관객들이 과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게 만드는 효과적인 소품이다.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은 자신이 겪었을 법한 유년의 상처와 외로움을 아리아라는 소녀를 통해 보편적 이야기로 그려낸다. 지울리나 살레르노는 깡마르고 기다란 몸에 동그랗고 겁에 질린 눈망울로 ‘아리아’를 연기하는데, 편견 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주인공 아리아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겨있다.

 

결핍이 심할수록 상상력은 풍부해지는 법이다. 무채색을 제외한 모든 색감을 한데 모아놓은 것 같은 영화의 질감은 아리아의 황량한 내면의 또 다른 표현이 되어, 아리아의 건조한 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부모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 거리를 떠도는 아리아의 모습은 흡사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를 떠오르게 만든다. 추위와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을 하나씩 켠다. 성냥이 켜질 때마다 소녀는 자신의 처참한 현실과 다른 환영에 빠진다. 하지만 성냥불은 너무 금방 사라진다. 행복과 배려가 결핍된 인생을 살다보면 그렇게 상상력이 넘쳐 과잉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아리아가 처한 건조한 인생과 대비되게 화려하고 노골적인 색감은 너무나 건조해 숨을 쉬기 어려운 소녀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환영의 세계라고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 의외의 순간, 아버지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고딕 호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아름다운 장면은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위험해 보인다. 학대에 가까운 아빠와 엄마의 강박과 이기심은 쉽게 용인되지 않지만, 세상에는 상상보다 훨씬 더 나쁜 부모가 ‘엄연히’ 있는 법이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

 

귀여운 반항아

끌로드 밀러 /샬롯 갱스부르 | 에이나인 미디어

아리아의 엄마로 나오는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여전히 건조하고, 깡마르고, 깊다. 세계적인 음악가 세르쥬 갱스부르와 배우 제인 버킨의 딸로 자라난 그녀의 성장기도 아시아 아르젠토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아리아>의 지울레나 살레리노처럼 1985년 끌로드 밀러의 성장영화 <귀여운 반항아>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성장 환경과 그녀의 영화 <귀여운 반항아>는 자연스럽게 한 소녀의 지독한 성장담 <아리아>와 오버랩 되면서 묘한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귀여운 반항아>는 지겨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한 소녀의 욕망을 담아낸 영화였다.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미모, 재능, 부유하고 다정한 부모)을 가진 동갑내기 소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한다. 결국 어느 곳으로도 도망가지 못하고 현실이라는 구심점으로 되돌아오는 현실, 아무런 추진력 없이 현실의 틈새를 부유하고 마는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는 지금 봐도 그 뒷맛이 떫고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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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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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기억의 성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촉, 행복했던 날의 냄새, 그리고 달콤한 미각이 포함된다. 게다가 차곡차곡 쌓아온 사회생활과 경력 모두가 오롯이 내 머리 속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니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어떻게 펼쳐질지 모를 미래까지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는 조발성 알츠하이머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그간 쌓아온 시간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볼 도리가 없는 주인공 앨리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과거와 가족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끔찍한 현실에 앞서, 앞으로 무엇을 더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자각이야말로 잔인한 현실이다. 게다가 기억이 사라지면서 나 자신의 존재도 함께 휘발되어버릴지 모른다.

 

저명한 언어학 박사 앨리스(줄리앤 무어)는 어느 날 강의를 하다가 문득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 경험을 한다. 조깅을 하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두뇌를 가졌던 한 여자의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겼다. 치매를 앓기에 너무 이른 50세, 그녀도 그녀의 가족도 닥친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치매라는 다소 흔한 소재를 사용하긴 했지만,<스틸 앨리스>는 보편적 사회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갑작스런 병을 앓게 된 한 여인의 개인적인 삶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그러기에 한 여인과 가족의 비극을 신파로 그리지 않고, 병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작은 감정의 변화에 집중한다. 줄곧 감정이 과잉되지 않게 절제하고, 애써 눈물을 강제하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는 줄리앤 무어를 만나 영화 속 앨리스는 감정이 과잉되지 않게 절제하고, 애써 눈물을 강제하는 법도 없이 아픔을 꾹꾹 눌러 담는다. 앨리스의 비극은 줄리앤 무어의 몸을 빌려 더욱 처연해진다.<달콤한 열여섯>으로 선댄스에서 인정받은 리처드 글랫처 감독은 이야기의 중심에 줄리앤 무어의 격조 있고 우아한 이미지를 투영시켰다. 어떤 순간에도 강인하게 버틸 것만 같은 줄리앤 무어의 이미지에 앨리스의 알츠하이머를 덧입혀 그녀를 무너뜨린다. 자신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앨리스가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눈빛은 어쩌면 쓸쓸한 한 여성의 삶을 말하는 이 영화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앨리스는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좌절의 상태에 머물러있지 않는다. 줄리앤 무어가 연기하는 한 여인의 불안과 슬픔의 정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계속 다잡아야 하는 마음의 용기와 결심의 정서는 줄리앤 무어의 연기와 함께 앨리스의 내면을 구축하는 또 다른 힘이다. 앨리스는 영화의 제목 그래도 ‘여전히 앨리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스스로를 독려한다. 알려진 대로 <스틸 앨리스>는 (故) 리처드 글랫저 감독의 유작이다. 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도 끝까지 촬영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이란 너무나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화두를 글랫저 감독은 마지막까지 몸소 살아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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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줄리앤 무어

 

배우의, 배우를 위한, 배우에 의한 영화 A가 있다. 대부분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력이라는 외줄 타기에 의지한다. 캐스팅이 성패의 관건이다. 어떤 이야기라도 믿어보게 만드는 배우 B가 있다. 푹푹 빠지는 이야기의 빈틈과 노련하지 못한 연출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스스로 디딤돌이 된다. 그렇다면 A라는 영화에 가장 필요한 것이 B라는 배우의 캐스팅일 것이다. 영화<스틸 앨리스>와 줄리앤 무어의 만남처럼…….2000년<매그놀리아>, 2009년 <세비지 그레이스>, <클로이> 등 영화 속 줄리앤 무어는 줄곧 불안과 음울한 기운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했다. 놀라운 것은 신경쇠약 직전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그녀는 단단하게 서서 크게 움직이거나 절규하지 않는다. 감정의 소동을 단단하게 딛고 선 여인의 복잡한 심리를 사소한 움직임과 눈빛으로 전달한다. 캐릭터가 느끼는 내적 갈등은 그녀를 덧입고 흔들림 없이 마지막 절정의 순간까지 도달한다. 2015 아카데미는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스스로 체화하여 ‘앨리스’ 자체가 된 줄리앤 무어에게 여우주연상을 선물했다.

 

<헝거게임 : 모킹제이>등 블록버스터에도 흔히 그녀를 볼 수 있지만, 줄리앤 무어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롯이 배우의 연기만으로 이야기가 이어져 나가는 작은 소품이다. 가장 인상적인 많은 영화들 속에는 늘 줄리앤 무어가 있다는 사실, 또래 여배우들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스스로 쌓아온 것이다. 신인감독 토드 헤인즈의 저예산영화<세이>와 막 데뷔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 나이트>에서 줄리앤 무어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며, 작품을 보는 그녀의 안목을 새삼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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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스틸 앨리스』 혹은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하버드대 신경학 박사 출신의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를 직접 겪으면서 『스틸 앨리스』라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집필하였다. 31개국에서 출간, 2,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이 소설은 철저한 소사와 개인적 경험이 합쳐져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리사 제노바의 원작의 영화화를 열정적으로 지지했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오른 영화 속 공연 장면에서 관객으로 특별출연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원제『Still Alice』가 아닌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라는 다소 감상적인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영화의 개봉과 함께 개정판 『스틸 앨리스』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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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괴물인가에 관한 잔혹 우화〈기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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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 파트1>에 대한 판단을 살짝 유보할 필요가 있었다. 기대가 워낙 커서였는지, 뭔가 하려던 말을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방대한 내용의 원작을 2부작으로 압축하려다 보니 아주 많은 이야기의 가지를 쳐내야 했을 것이다. 주인공 소년 신이치의 내면의 변화와 오른쪽이의 말처럼 ‘악마’에 가장 가까운 것이 인간이라는 자기반성까지 담아내기에는 무리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해하는데 무리 없이 잘 정리된 스토리 라인도 무난했고, 흑백만화가 아닌 실사에서 보기 꺼려지는 신체훼손의 잔혹한 장면들도 강약 조절을 잘했다. <기생수 파트1>을 클라이맥스로 치달을<기생수 파트2>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작으로 치자면 큰 무리도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영화 <기생수>는 이와아키 이토시의 원작만화 『기생수』와의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결국 원작이 있는 영화는 두 가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야 했다. 원작의 팬을 위해 원작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하며,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의 기대도 충족시켜 줘야 하기 때문이다. <기생수 파트 1>은 비교적 각색이 잘된 영화였음에도 완결형은 아니었다.<기생수 파트 2>가 열리면서 비로소 완성된 <기생수> 시리즈는 원작의 결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꽤 세련되고 노련한 방법으로 각색을 잘한 작품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아키 이토시의 원작만화 『기생수』는 인간의 두뇌를 먹어 신체를 강탈한 생명체들이 생존을 위해 인간의 몸을 먹는다는 상상력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동시에 담아내며, 인간의 몸을 산산이 해체해 버리는 폭력성과 문명사회를 비꼬는 블랙 유머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많은 등장인물과 철학적 사유, 흑백 평면에 펼쳐진 잔혹한 상상력을 컬러 실사로 재현하는 어려움 때문에 작품의 큰 인기에도 쉽게 영화화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프렌즈 : 몬스터 섬의 비밀>, <도라에몽 : 스탠 바이 미> 같은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알려진 야마자키 타가시 감독은 최고의 CG 전문가들과 함께 제법 유연한 연출력으로 원작의 재미와 의미를 충실히 재현한다. 나아가 기생수들의 유연한 움직임을 실사 배우들과 유연하게 엮어내면서, 원작에서의 잔혹한 장면들을 직접 보여주기 보다는 상상에 맡긴다거나 신이치의 아버지나 텔레파시 소녀 카나 등 주요인물을 과감하게 없애고, 신이치와 기생수 사이, 혹은 인간과 기생생물 사이의 충돌에 집중하는 등 영화적 재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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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 파트1>이 오른쪽이와 공생하게 된 신이치의 상황과 기생수들이 인간을 위협하는 상황을 부각시켰다면<기생수 파트2>에서는 인간과 기생수 사이의 싸움으로 이야기가 집중된다. 신이치(소메타니 쇼타)는 기생수에게 엄마와 친구들을 잃고, 오른쪽이라고 명명한 자신의 기생수와 함께 인류를 위협하는 다른 기생수와 맞서 싸울 것을 다짐한다. 1편에는 기생수들의 침입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마는 나약한 인간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2편에서는 괴력을 얻게 된 신이치가 기생수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파트1의 마지막에 암시했던 것처럼 5개의 기생수가 한 사람의 몸에 들어가 공존하는 고토(아사노 타다노부)라는 초강력 기생수의 등장이 파트 2를 더욱 팽팽하고 흥미롭게 만든다. 일본영화의 큰 흐름, 그 중심에 서 있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등장은 강렬하면서도 효과적이다. 무표정하면서도 강렬하고, 섬뜩한 고토라는 캐릭터는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를 입어 만화보다 더 잔혹한 캐릭터가 되었다. 여기에 인간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료코(후카쓰 에리)가 아이를 출산하면서 벌어지는 기생수의 변화도 원작의 의미를 잘 담아낸다. 료코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꿈꾸는 캐릭터로 변해간다. 1편에서는 두루뭉술하게 그려졌던 원작의 메시지는 비로소 2편에 이르러 명확해진다. <기생수 파트2>는 무분별하게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에서 가장 잔인한, 악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의 모순을 꼬집는 잔혹 우화로 거듭났다.

 

기생생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과 액션은 실사와 함께 매끈하게 이어진다. 만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오른쪽이의 움직임은 훨씬 더 귀여워서 애정이 간다. 게다가 너무 많이 생략되어 조금은 밋밋했던 캐릭터들이 2편에서는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도 2편을 더욱 즐길만하게 만든다. 인간과 기생생물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연쇄살인마 우라카미(아라이 히로후미)와 신이치를 감시하는 언론인 쿠라모리 등이 그들이다. 연쇄살인마를 통해 기생수와 사람 중 누가 더 잔혹한가를 생각해 보라는 원작자의 의도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원작처럼<기생수 파트 2>는 명확한 결말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에게 판단을 맡기면서, 깊이 사유해보길 권한다. 당연히 <기생수 파트 2><기생수 파트 1>을 본 다음 봐야하지만, 원작만화는 영화의 전후, 혹은 사이에서라도 꼭 보길 권한다. 자그마치 5년 동안 연재된 원작만화 속에는 영화 속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많은 에피소드와 매혹적인 인물, 그리고 그 만큼의 질문들이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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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물어 고리 〈악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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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했지만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꼬리를 물린 첫 번째 놈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문 마지막 놈의 꼬리를 물어버리면 거대한 하나의 고리가 되는 법이다. 일단 고리가 되어버린 악은 그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모르게 순환한다. 맞물린 자양분으로 근근이 버텨지는 이 순환의 고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끈끈하게 연대해야 한다. 누군가 나서 입을 풀어버리면 당장 내가 죽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백운학 감독의 <악의 연대기>는 제목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악행이 연대를 이뤄 거대한 고리가 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리고 그 거대한 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첫 번째 놈이 입을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다.

 

승진을 앞둔 최반장(손현주)은 회식 후 괴한에게 납치를 당한다. 납치범과 혈투 끝에 최반장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승진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기로 한다. 하지만 다음 날 최반장이 죽인 시체가 경찰서 앞 공사장 크레인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 국민적 관심을 끄는 사건이 되고,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담당하게 된 최반장은 점점 좁혀지는 수사망에 불안해한다.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오형사(마동석)은 그를 끝까지 믿고 따른다. 동생처럼 살가운 신참 형사 차동재(박서준)은 몇 가지 단서 때문에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서장의 도움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마약 복용으로 전과가 있는 배우 김진규(최다니엘)가 자신이 진범이라며 경찰서에 나타난다. 최반장의 이야기로 흘러가던 사건이 뿌리 채 흔들리는 건 이때부터다. 사건의 판을 짠 또 다른 인물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관객들이 알게 된 순간, 영화는 하나의 복수극이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결승전을 향하는 레이싱 경주처럼 질주하고 그 속도에 맞춰 배우들도 전력질주를 한다. 영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누가 범인인가 맞춰 보는 관객의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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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백운학 감독의 영화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튜브>에서 였다. 1999년 <쉬리> 이후 촉발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핏줄을 잇기 위해 제작된 영화 중 ‘지하철’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세련된 CG 기술로 꽤 공을 들이고, 김석훈, 배두나 등 믿을만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기대작이었다. 게다가 백운학 감독은 <쉬리>의 조감독 출신이었다. 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인색했던 평단의 반응도 미적지근했고, 관객들의 기대도 크게 충족시키지는 못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12년 만의 복귀작 <악의 연대기>는 감독이 그 동안 얼마나 절치부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만큼 <악의 연대기>는 그 모양새가 꽤 튼튼하고 짜임새 있는 스릴러 영화다. 굳이 설명하자면 인물의 구성과 이야기의 짜임새,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조되는 긴장감과 거듭되는 반전 등을 보고 있자면 한국형 스릴러 영화의 교과서라 불러도 될 법하다. 딱히 악인도 선인도 없는 등장인물 사이의 이야기를 통해 ‘악’을 이야기 하는 주제 의식도 좋고 특별히 잔인하지 않은 씬들 덕분에 징그러운 장면을 싫어하는 관객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최대의 장점들은 반대로 아쉬운 점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잘 짜인 이야기와 인물의 구성은 너무 익숙해서 반전이 쉽게 드러날 수 있고, 반전을 위해 깔아둔 복선 역시 조금 도식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제 몫을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주연과 조연의 구별이 없이 촘촘하다. 손현주는 위풍당당하던 초반 모습에서 살인사건이 드러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최반장의 내면까지 눈빛과 몸짓으로 오롯이 소화해낸다. 늘 단단한 배우 마동석, 냉혈한 서장 정원중을 비롯해서 비밀의 열쇠를 쥔 최 다니엘의 등장도 강렬하고 신참 형사 역할로 영화 데뷔한 박서준 역시 잘 짜인 이야기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진심어린 연기를 선보인다. 세련된 시나리오와 좋은 배우들이 만난 셈이다. <악의 연대기>는 어느 하나 빠지지 않은 훌륭한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단단한 스릴러 장르 영화라기보다, 섬세하게 빠져드는 드라마로 읽힌다. 사실 악인과 선인의 구별이 없어 누구 하나 마음 붙일 사람이 없어 허전할 법도 한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이 없는 만큼 더 섬세해진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모두 가련하고 동정이 가는 인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논리가 아닌, 인물들의 정서로 이끌고 가는 감성 스릴러가 되었다. 소재의 유사성 때문에 <끝까지 간다>와 비교되지만, 그 영화의 결이 너무 달라 섣부른 비교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물론 각각의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취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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