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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vs 명랑해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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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적.jpg

 

서울에만 500개에 가까운 상영관이 있다는데 솔직히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숫자보다 골라 볼 영화가 적다는 사실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여름 한국 영화 빅4로 불리는<군도>, <명량>, <해적>이 거대 배급사를 등에 업고 1주일 간격으로 개봉했고 곧 <해무>가 개봉할 예정이라 사정은 더 심각해질 예정이다. 쇼박스가 배급을 맡은<군도>는 1,300여개의 상영관을, CJ에서 배급을 맡은 <명량>은 자회사인 CGV를 중심으로 1,500개가 넘는 유래 없는 독과점으로 전국 극장을 초토화시켰다. 롯데에서 배급을 맡은<해적>역시 롯데시네마를 중심으로 900개의 상영관을 확보한 상태다. 다양성 영화들 중 일부는 그나마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선전하고 있지만, 문제는 규모가 작은 상업영화들이다. 주말을 시점으로 <명량>은 천만 관객의 영화가 되었다. 기쁜 소식이지만, 9월 추석 대목을 앞둔 대작들 틈에서 계속 밀려나는 작은 영화들도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 


 

영웅 권하는 시대, <명량>

<명량>은 신드롬이 되었다. 최단기간 1,000만 관객 기록을 갱신했다. 1,500개의 상영관을 선점한 것도 유래 없는 일이고, 개봉일 기준 최다 관객동원 기록도 세웠다. 그러다 보니 주변사람 모두<명량>을 보았다고 말한다. 주말이면 SNS를 통해 보게 되는 지인들의 인증 샷도 대부분<명량>이다. 지금 이 시대에<명량>을 관람하는 것이 하나의 이벤트가 된 셈이다. 과연<명량>이라는 영화가 천만 관객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만드는 영화인가 하는 의문은 말끔하게 도려내지지 않는다. 만듦새의 아쉬움, 몇몇 단조로운 캐릭터, 무겁고 지루한 중반부의 이야기 등 단점도 두드러지지만, <명량>이 힘을 준 부분과 그 어법은 명확하다.

 

위정자들이 득세하는 세상,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영웅의 모습이 신파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울컥,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200억의 제작비를 들여 생생하게 살려낸 해상 전투신, 죽을 각오로 연기하는 최민식을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 점점 더 골 깊어지는 반일감정 등 <명량>의 흥행 요인은 많지만, 가장 큰 흥행 요인은 ‘리더’가 없는 2014년 한국이라는 현실이다.

 

지금 한국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버텨내야 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순신이 보여주는 리더십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잘 알려진 대로 <명량>은 조선 중기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아주 작은 수의 조선 수군을 이끌고 왜군의 침입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던 명량해전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 속 이순신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 빼어난 리더십과 전략으로 기적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이상적인 지도자를 잃은, 혹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순신이야 말로 꿈꿔보고 싶은 기적인 셈이다. 이런 갈망이 폭발적인 흥행과 이어져 사회현상이 되었다. 게다가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백성이 곧 충(忠)이요 천행(天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죽음도 불사하며 싸우는 모습에 울컥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처럼 민중을 이용하기 위해 앞서지 않는다. 그는 민중을 위해 앞서 싸운다.

 

하지만, 여기에<명량>의 역설이 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난세라는 말이다. 또한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구하리란 막연한 믿음은 그저 짧은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와중에 진중권 교수가 SNS를 통해<명량>을 졸작이라 혹평했고, 박대통령과 김실장은 <명량>을 관람한 후 국민들이 이순신 장군처럼 힘을 내길 바란다고 했다. 각각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메시지에 입장차가 있는 모양새다. 오독하기에<명량>의 메시지는 충분히 직설적이고 단선적인데 말이다.


 


명랑한 해적들, <해적 : 바다로 간 산적>

 

한국영화 빅4는 장르와 소재에 따라 다시 사극 빅3, 바다 빅3로 나뉜다. 사극이면서 바다가 나오는 작품은<명량><해적>이니, 두 작품은 일종의 직접적인 라이벌인 셈이다.<군도>의 서사는 경쾌했지만, 유쾌하지 않았고<명량>의 메시지는 진중하지만 너무 무거웠다. 4편의 영화 중 무게감으로는 제일 떨어진다는 평가를 얻었던 <해적>이 제일 불리해 보이는 게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무겁지 않은 것이 <해적>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해적>은 ‘명랑함’이라는 가벼움을 그 장점이자 특기로 내세운다. 개연성이 좀 없어도, 이야기의 결이 거칠어도 상관없다. 깃털처럼 가볍게 날듯이 즐기자는 것이 <해적>의 목표이다. <해적>은 생각하면서 보기 시작하면 쉽게 지치게 되는 영화다. 그냥 코미디로 봉합된 이야기조차도 재밌지 않냐는 넉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골고루 만족할만한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

 

조선 건국 보름 전 고래의 습격을 받아 국새가 사라진 사건을 배경으로 한 <해적>은 해적과 산적, 그리고 개국세력이 모여 벌이는 코미디에 집중한다. 미술, 분장, 음악, 의상 등 시대적 고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해적>은 130억을 투자한 만큼, CG에도 공을 들였는데, 국새를 삼킨 귀신고래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 세밀한 완성도 때문에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드라마 <상어> 이후 다시 만난 손예진과 김남길 커플은 무거웠던 전작에 비해 노는 듯이 즐거워 보인다. 특히 진중했던 이미지에서 벗어나 깨방정을 떨어대는 김남길은 신선해 보인다.

 

<해적>이 고마워해야 할 인물은 철봉 역할의 유해진이다. 최초 해적이었으나 뱃멀미 때문에 산적으로 전향했다는 캐릭터도 재미있는데, 유해진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사소한 몸짓으로도 웃음을 선사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수다와 오버 액션에도 밉지 않으니 감초 연기의 진수라 할만하다. 하지만 구멍 난 이야기를 메워주는 배우의 개인기도 후반부가 될수록 조금 피곤해진다는 것은 단점이다.

 

유해진 이외에 <해적>에는 오달수, 박철민, 김태우, 이경영, 신정근 등 빼어난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없다보니 캐릭터의 존재감도 희미해진다. 이석훈 감독의 영화들은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준다. 독창적 코미디 영화로 인정받았던 <방과 후 옥상>은 <세 시의 결투>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은 적 있다. <해적>은 팩션 사극의 모양새는 하고 있지만, 그 형식이 참신하지 않아<캐리비안의 해적>과 비교되는 숙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하긴,<해적><캐리비안의 해적>으로 대표되는 코믹 어드벤처 장르영화의 노선과 그 가이드를 따르는 것을 처음부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추천 기사]

- 흑. 흑. 너무 하잖아요 <혹성탈출>
- 무엇을 상상하건 다른 것을 볼 것이다, <군도 : 민란의 시대>
- 가족, 변하지 않는 그 정서의 이어달리기 <동경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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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별도 잘못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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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솔직히 싫어하는 명제다. 얼핏 위로가 되는 것 같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왠지 무책임한 기성세대의 언어 같기 때문이다. 솔직히 삶을 감당하고 버텨 살아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숙제다. 때론 힘들지만 가끔은 웃고 행복하기도 하고, 싸우고 상처주고 받으면서도 여전히 살아야 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일 것이다.<안녕, 헤이즐>은 몸이 아픈 청춘의 이야기다. 물론 몸이 아파, 마음도 그만큼 아프다.

 

하지만, <안녕, 헤이즐>은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짧은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동정하지도 않고, 훈계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무척 영리하다.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청춘 영화의 공식 속에 명민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깔아두고, 울컥하는 눈물과 잔잔한 감동, 포근한 감성까지 놓치는 법이 없다. 언제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이 여전히 그 나이 또래의 고민과 사랑을 겪으면서 훌쩍 자라는 성장담이며,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감싸는 부모들의 마음까지도 다독거린다. 그렇게<안녕, 헤이즐>은 여전히 반짝 반짝 빛나는 청춘과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는 풋풋한 사랑을 예찬한다. 

 



 

말기 암환자인 헤이즐(셰일린 우들리)은 13살부터 암과 싸우며 산소통을 늘 곁에 두어야 하는 소녀다. 부모의 권유로 암환자 모임에 억지로 참석했다가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를 만난다. 환한 미소가 매력적인 소년과 또래보다 성숙한 마음을 지닌 소녀는 너무 다른 취향을 가졌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예쁜 사랑을 키워나간다. 헤이즐은 페터 반 후텐(윌렘 대포)의 소설을 감명 깊게 되풀이해 읽고, 그를 만나 소설 이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소원이다. 어거스터스 덕분에 암스테르담에 가게 되는 소원을 이룬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피터의 집으로 찾아간다.

 

명민한 관객이라면 대부분 예측했겠지만, 피터와의 만남은 예측을 벗어나는 충격이 된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에 대한 헤이즐의 과도한 집착이 보기 좋게 깨지면서 다시 한 번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런 점에서 ‘안네 프랑크의 집’ 장면은 헤이즐의 정신적 성장에 대해, 헤이즐과 관객들이 함께 겪어야 하는 초조하고 숨 막히면서도 동시에 극복 가능한 성장담이 된다.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녹음된 목소리는 계속 이렇게 되뇐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가 삶의 일부분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빛과 희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안녕, 헤이즐>은 어떤 의미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을 향해 정해진 방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뻔해 보이는 이야기는 여전히 반짝 반짝 빛나고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진다. 마저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추도식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그리고 잔잔한 감동은 도식적이지만 따뜻한 진심을 담고 있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이들의 삶을 애써 포장하거나 미화하려하지 않는 덤덤한 화법은 신선하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데이트를 즐기는 해골 놀이터처럼, 이 영화는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죽은 후 망각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헤이즐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작가조차도 스스로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알코올중독자 찌질이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고 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헤이즐의 과도한 집착이, 죽은 자를 기억하기 보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위로해줘야 한다는 성찰로 이어지는 극의 구성은 단순한 청춘 영화 이상으로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전작 <스턱 인 러브>를 통해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조쉬 분 감독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원작 소설의 철학적 고민은 조금 덜어내고 예쁜 청춘의 로맨스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적이다. 1,200만 불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는 북미에서만 1억2천만 불의 흥행 수익을 내면서 21세기의 대표적 청춘 영화로 부상했다. 당연히 청춘영화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관객에겐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안녕, 헤이즐>은 타깃이 분명하고 그 타깃에게 어떤 이야기와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충실하게 계산된 영리한 영화다. 그리고 영화는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지, 라는 기성세대의 언어를 사용하는 멘토 대신, 실연당한 친구를 위해 계란을 준비하는 친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영화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 소박한 마음은 통했다.

 

안녕헤이즐

 

원작 소설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 The fault in our stars>

 

로맨스 영화에 재능이 있는 조쉬 분 감독의 연출과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셰일린 우들리, 안셀 엘고트라는 예쁜 배우들 덕분에 영화는 빛나지만,<안녕, 헤이즐>이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은 원작가 존 그린이다. 자칫 신파에 빠지기 쉬운 이야기를 기막힌 청춘의 성찰로 끌어가는 건 존 그린의 원작에 힘입은 바 크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매끈하고 경쾌한 로맨스로 풀어내는 작가의 빼어난 문구들은 영화가 자칫 유치해지는 순간, 영화 속 명대사가 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담배를 물고만 있는 소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을 폭탄이라고 생각하는 소녀의 캐릭터도 입체적이고, 소박한 이야기 속에 삶의 성찰을 담아내는 문장들이 감탄스럽다.

 

원작 소설의 제목인<The fault in our stars>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인용한 문구다. 시저의 암살 음모를 주도한 캐시어스는 ‘잘못은 우리 운명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네’라고 말한다는 것에서 인용하였다. 개인에게 닥치는 행운과 불운이 운명의 탓이 아니라, 결국 본인이 과거에 내린 결정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원제를<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로 번역한 한국어 제목은 매력적인 의역이지만, 결국 존 그린은 원작을 통해 우리의 삶의 변수는 운명의 탓이 아닌, 개인의 선택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 국내 개봉영화에서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라는 근사한 제목 대신<안녕, 헤이즐>이라는 심심한 제목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원작소설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는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아마존닷컴 등 영향력 있는 여러 매체를 통해 2012년 최고의 소설로 손꼽혔다. 영화가 미처 품어내지 못한 더 매력적인 이야기는 책으로 꼭 확인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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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게 마주선 공포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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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화라는 사실은 서늘한 공포가 되어 일상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생채기가 불쑥 흉터처럼 되살아날 때, 느끼는 서늘한 공포, 그 일상성은 상처가 되어 꽤 오래 지속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공포영화<인보카머스>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실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의 촬영을 통해, 마주 선 공포의 근원이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도 있을 수 있다는 현실적 공포를 주는 영화다. 그렇게 실화라는 이야기가 주는 설득력과 함께, 실제 범죄 장소라는 영화의 배경이 또 다른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뉴욕의 브롱크스 지역은 노동자 계급이 모여 사는 곳으로, 오래된 주택가와 생기 없는 일상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고, 1980년 이후 처음으로 내부 촬영을 허락한 브롱크스 동물원의 이미지는 영화와 딱 맞아떨어지는 으스스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위적인 공간과 가공의 스토리가 아닌, 실제 공간과 이야기라는 리얼함이 다른 공포영화보다 한 수 앞선 이야기의 설득력과 현장감 있는 공포로 다가온다. 보이지 않지만 항상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는 공포의 근원, 혹은 악의 근원을 되짚는 영화의 메시지도 강렬하다.

 

살인, 강도, 영아사체 등 매일 매일 끔찍한 범죄의 현장을 마주해야 하는 형사 랄프 서치(에릭 바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이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올리비아 문)와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지만, 지옥 같은 세상은 그를 온전한 행복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런데, 서치에게는 일상적인 것 같던 사건들이 점점 기괴해지기 시작한다. 서치와 그의 동료 버틀러는 연관성 없어 보이던 귀신들린 집, 브롱크스 동물원의 노숙자, 가정폭력 등의 사건들 속 용의자들이 모두 같이 함께 있는 사진을 발견한다. 조사 과정에서 용의자들 모두 아부다비에 파병된 군인이었음이 밝혀진다. 이들은 자해, 동물학대, 자살시도 등 정상적인 생활에서 멀어져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악행들이 아부다비에서 겪었던 초현실적 경험에서 벌어진 일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서치 앞에 퇴마를 전문으로 하는 신부(에드거 라미레즈)가 나타나면서 사건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엑소시즘이라는 심령 공포에 범죄 수사라는 스릴러적인 요소까지 가미된<인보카머스>는 공포라는 기본 전제 아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추리적 요소가 주는 재미까지 더해진 영화다. 2005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를 통해 엑소시즘의 공포, 2012년<살인소설>을 통해 촘촘하게 배열된 이야기의 공포를 잘 보여준 스콧 데릭슨 감독은 스릴러와 호러를 허구가 아닌 실화 속에 녹여내면서, 이 모든 이야기가 내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설득하면서 공포감을 직조해 낸다. 더불어 시각적인 공포와 청각적인 효과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은 어둠에 파묻힌 밤이다. 어둠 속에 겨우 식별 가능한 얼굴이 사람의 것인지 귀신의 것인지 분간이 어려운 순간에 툭 튀어나오는 장면이나, 주파수가 어긋난 잡음, 갑작스런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 신경을 긁는 소리와 영상이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인보카머스

<인보카머스> 스틸컷

 

퇴마의식이 소재로 등장한 만큼 극의 클라이맥스는 퇴마의식으로 치닫는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치러지는 엑소시즘은 밀실공포의 정점으로 치솟는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엑소시즘 영화가 연약한 소녀의 몸에 깃든 악령을 퇴치하는 것이었다면, <인보카머스> 속 귀신 들린 남자는 건장한 남성이다. 당연히 살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퇴마 의식의 수위는 하드 고어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충격적인 사건을 모두 경험했던 실존인물 랄프 서치가 20년간 뉴욕 경찰로 일하면서 직접 체험했던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을 모아 엮은 소설 <Beware the Night>를 원작으로 한다. 믿을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이 실화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스콧 데릭슨 감독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원작 속 이야기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극적이며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추려 각본에 담아냈다.

 

<인보카머스>가 가장 무서운 순간은 영화 속에 표현된 그 잔혹한 범죄들이 모두 현실에서 벌어졌던 실화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갓난아기의 시체,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벽을 긁어대는 남자, 자신의 아기를 사자 우리에 던져버린 엄마 등 이 섬뜩한 이야기들이 모두 실제 뉴욕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지 못하지만, 이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일들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일상 속에 공기처럼 내재적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로만 보면 윌리엄 프리드킨의 1973년작 <엑소시스트>의 초자연적 악령과, 1995년 데이비드 핀처가 만든 연쇄살인 수사물<세븐>을 손쉽게 떠올릴 수 있다. 과거의 비밀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랄프 서치의 고뇌는 에릭 바나를 통해 진지하게 그려진다. 또 순간순간 강렬한 이미지와 비밀을 밝혀나가는 몇 가지 에피소드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압도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스콧 데릭슨 감독은 우리 삶의 공포를 추리, 서스펜스, 액션, 고어, 그리고 엑소시즘의 초자연현상까지 골고루 버무려 흥미로운 공포영화를 만들어내면서도 어수선하지 않은 연출력을 선보인다.

 

장르 영화 속에 이렇게 다양한 요소를 치우치지 않게 잘 버무린 솜씨는 제작자인 제리 브룩하이머의 역량에 기댄 바 크다. CSI 시리즈를 꽤 오랫동안 제작해온 노하우를 반영해, <인보카머스>는 공포 영화의 장르 속에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듯한 추리적 요소가 제법 흥미롭고 보암직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 더 잔혹해야 할 순간에 수위를 조절하고, 조금 더 파괴적이어야 할 결론의 순간에 조금 주춤거리면서 단정하게 마무리 되는 결론은 조금 아쉽다. 개인적으로 초반부, 끊어질 듯 팽팽하면서 압도적인 이야기가 더 파괴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길 짐짓 바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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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추석연휴 극장가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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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영화계 최대의 대목으로 손꼽히는 추석을 앞두고 각 영화들이 막바지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명량>의 2천만 관객 돌파 여부가 관심사가 된 가운데, 여전히 흥행중인<해적-바다로 간 산적><해무>의 흥행세 역시 추석 시즌까지 이어질 예정이라 접전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음식으로 비교하자면, 풍성하고 푸짐한 한정식이라기보다는, 고급지고 호화로운 단품 요리 같은 느낌이 드는 라인업이다. 추석시즌 흔히 볼 수 있던 가벼운 코미디 영화 대신, 잔잔한 감동을 주는 가족영화 <두근두근 내 인생>, 성인 관객들을 타깃으로 더욱 화려해진 <타짜 2>, 그리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루시>의 삼파전이 예상된다.

 

두근두근내인생

 

가족을 위한 <두근두근 내 인생>

 

송혜교가 한때 아이돌 가수를 꿈꿨지만 실수로 17세에 엄마가 된 여자로, 강동원이 기존의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버리고 철부지 아빠 역으로 캐스팅된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 <정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등 여성의 감성을 자극하는 섬세한 화법으로 인정받은 이재용 감독의 연출까지 더해져 영화에 대한 기대감만은 블록버스터 못지않다. 훌륭한 배우와 감독이 뭉쳤지만, 영화의 승부수는 역시 원작이다.

 

김애란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는 17세에 부모가 된 철부지들과 세상에서 가장 늙은 아들이 나누는 사랑이라는 따뜻한 소재와 함께 삶의 다양한 순간을 아우르는 재치 있고, 관조적인 문체를 선보인다. 무거울 수도 있는 소재지만 원작소설은 주로 유쾌하고, 아련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다가 극적인 순간에 울컥 울게 만든다. 원작의 결을 제대로만 살린다면 눈물을 강요하는 최루성 신파 영화가 아닌, 삶을 관조하고 잔잔하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영화가 될 조건은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다.

 

12세 관람가 등급과 배급사 CJ의 영향력, 배우들에 대한 기대감, 추석 유일의 가족영화라는 유리한 조건으로 시작했지만 주인공의 탈세의혹이라는 복병을 맞이했다. 송혜교는 시사회장에서 공식입장을 밝히는 등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네티즌들의 별점 테러를 벌이고 있다. 흥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개봉시점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성인을 위한<타짜-신의 손>

 

허영만 화백의 동명 만화를 영화화한 최동훈 감독의<타짜> 2006년 추석 시즌에 개봉하여 기대 이상의 흥행 수익을 얻었던 작품이다. 탄탄한 원작의 이야기에 더해, 명품 배우들의 연기에 쫄깃한 감독의 연출력까지 더해진 작품이었다. 8년 만에 나온 2탄 <타짜-신의 손>은 성인관객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꽤 수위가 센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전작과 어쩔 수 없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젊은 배우들로 주인공을 바꾸고,<과속 스캔들><써니>로 명절기간 흥행 신화를 새롭게 쓴 강형철 감독에게 연출을 맡겼다. 빅뱅의 탑이 아닌 배우 최승현은 <포화 속으로>에서 호평을 얻었지만 <동창생>의 흥행실패로 아쉬움을 남겼다. 신세경 역시 TV 드라마 이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작품이 없다. 젊은 배우들에 대한 불안감은 곽도원, 유해진, 김윤석, 이경영, 오정세 등 연기파 배우들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모양새로 불식시킨다.

 

루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팬을 위한 <루시>

 

그래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화려함을 원하는 관객을 위해서는 뤽 베송의<루시>가 있다. 마약을 운반하던 중 초능력을 얻게 된 여주인공 루시가 생존을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린 액션물이다. 섹시하고 강인한 여전사 루시 역할에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된 것이 화제가 되었고, 국내 관객에게는 최민식이 루시와 혈투를 벌이는 마약조식의 보스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 더 화제가 되었다. <명량>을 통해 국내 최고의 흥행배우가 된 최민식의 할리우드 영화 데뷔작에 대한 기대감이 흥행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또한 <루시>는 무거운 생각을 내려놓고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락영화이다. 미국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이미 흥행 수익 1억 달러를 넘기는 등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흥행 배우가 된 최민식에겐 요즈음이 인생 최고의 시기일 것 같다. 할리우드에 데뷔한 한국 배우들이 비중이나 역할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던 것과 비교해 최민식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해 보자.

 

소수의 열정적 관객을 위한<자유의 언덕>

 

한국영화 4파전의 틈에 끼었지만 <프란시스 하>는 개봉 한 달 동안 7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도 개봉한달 만에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40대 이상 관객을 타깃으로 한 소피 마르소의 <어떤 만남>도 적은 스크린 수에 비해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추석시즌에도 작은 영화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남들 다 보는 영화 말고, 나만을 유혹할 만한 깊이 있는 영화를 찾는 관객을 위해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이 자리 잡았다.

 

제7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올해부터 경쟁부문으로 변경된 오리종티 장편 부문에 공식 초청된데 이어, 9월 토론토 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는 등 해외에서의 반응이 국내보다 훨씬 빠르고 뜨겁다. 67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다소 부담스러웠던 관객에게 도전해볼만한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고, 모호한 대화를 나누고, 어색한 관계를 이어가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일상의 공간을 낯설게 만들어 오던 홍상수 감독은 어느 순간 해외의 낯선 이방인들을 통해 이야기에 더 진한 거리감을 만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자벨 위페르와 제인 버킨에 이어 홍상수의 세계로 들어온 남자는 일본배우 카세 료이다. <하하하>와 <다른 나라에서>에 출연했던 문소리, <잘 알지도 못하면서>,<옥희의 영화>에 출연했던 서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으로 새로운 홍상수의 얼굴이 된 정은채와 중견배우 윤여정이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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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다른 시간 속을 사는 가족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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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너무 일찍 많은 것을 겪어버린 청춘들, 어떤 고통과 슬픔도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품새로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다독인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 너무 일찍 늙어버리는 아들을 키워야 하는 이 젊은 부모는 세상의 이치를 깨치고, 삶은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절망 혹은 그것을 뛰어넘어 관조하기에도 여전히 젊은 청춘이다. 이 가족들은 가끔 아주 반짝 반짝 빛나는데, 그들이 여전히 철없는 청춘의 나이이고, 이미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조로증 아들 역시 늙어버린 모습과 달리 그 마음만은 여전히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여전히 젊어서 반짝이는 세 식구를 통해 우리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화려하고 행복한 생활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있는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훌쩍 떠나버리고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은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그 삶 속에 서로의 존재가 누구보다 소중한 철부지 가족의 이야기는 그렇게 덜컹, 마음을 움직인다.



 

16세 소년 아름(조성목)은 조로증에 걸렸다. 3살 때부터 늙어가기 시작해서, 이제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 아름의 부모인 대수(강동원)와 미라(송혜교)는 17세에 아름이를 가졌기에 이제 겨우 33살의 젊은 부모이다. 아름이는 대수와 미라를 위해 마지막 선물로 부모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 한다. 김애란 소설가의 동명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기대처럼 원작의 장점들에 기대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철없어 여전히 귀여운 아빠, 17세에 임신해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욕쟁이 엄마, 그리고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두근두근’한 인생을 들려주는 아름이라는 캐릭터는 자칫 신파일 수도 있을 이야기를 매력적인 판타지로 만들어주었다. 영화에서는 아름이가 너무 조용하고 성숙한 아이, 욕쟁이 ‘X발 공주’인 엄마가 그저 아픈 아이를 돌보는 평이한 엄마로 그려진 것은 조금 아쉽다. 게다가 ‘두근두근’ 떨리는 그 생생한 마음의 움직임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명쾌하지 않다. 고통까지도 동화처럼 유유하게 넘겨 버리는, 현실에서 한 뼘 쯤 둥둥 떠 있는 원작 소설의 판타지를 영화로 끌어오면서 영화도 현실에 깊이 발을 딛고 서진 못했다.

 

소소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장점은 분명하다. 삶을 위로하고, 긍정하면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이를 통해 감동을 느끼게 하려는 이재용 감독에 의해 연출된 이야기는 억지스럽지 않고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죽음을 앞둔 한 아이의 삶을 따뜻한 정서로 품어내는 영화의 설정은 소설의 발랄한 정서를 가능한 건져 올려, 자칫 인간극장 같아질 이야기의 한계를 극복한다. 너무 예쁜 배우들이라 적합할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강동원과 송혜교는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쁜 어린 부모를 성심껏 담아낸다.

 

아름이 역의 조성목은 호들갑스럽지 않게 작고 늙은 아이의 슬픔과 정서를 담아내고, 귀여운 할아버지 백일섭과 짧은 등장에도 아비의 속 깊은 사랑을 보여준 김갑수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치매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옆집 할아버지, 자기 자신이 아버지이지만 정작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를 끊어버린 대수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철부지 대수와 철든 아들 아람이의 에피소드는 누군가의 아들, 딸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나 누군가의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울컥하는 정서를 느끼게 한다.

 

<두근두근 내 인생>속 주인공들은 세상과 다른 속도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10대에 부모가 되었고, 병에 걸린 아이를 키웠고 17세를 앞두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소년의 시계는 세상의 일상적인 흐름에서 유리되어 있지만, 또 그 다른 속도 때문에 다른 결의 이야기를 품어낸다. ‘두근두근’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설렘보다는 살아내야 하는 ‘인생’에 방점을 찍은 연출은 조금 아쉽지만, 두근거리지 않더라도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 말하는<두근두근 내 인생>은 충분히 공감 가능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두근두근내인생

 

원작자 김애란

 

2002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등단했다. 『달려라 아비』를 통해 전통적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를 철부지로 표현하면서도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아픔을 경쾌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어머니를 말하는 딸이라는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풀어낸 「칼자국」에서는 상처를 상처로 드러내지 않는 특유의 화법으로 주목받았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김애란의 첫 장편소설이다. 문단과 독자의 기대에 위축되지 않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칼날 같은 관계 대신 담백하고 신선한 필력으로 부모된 자의 태도와 나이를 먹거나 혹은 죽어가는 사실에 대해 신파적 정서를 깔아놓고서도 결코 그 정서에 휘청이지 않는 필력으로 울컥, 하는 감동을 선사한다.『두근두근 내 인생』은 올 2월 프랑스에서 출간되었고, 현재 영어권 출판을 기획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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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시린 발, 내민 손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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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시린 바닥에 맨 발로 선 아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잠시나마 따뜻하라고 뜨거운 물을 부어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양말을 툭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쳐 갈 것이다. 그렇게 시린 시절을 나도 보냈다고, 한 때라고, 차갑고 시리니 청춘이라는 말을 무용담처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야간비행>은 마음이 시리고 외로운 사람들의 맨발을 꾸역꾸역 이렇게라도 들여다보자고 말하는 영화다. 그렇다고 따뜻한 물로 발을 씻겨주고, 깨끗한 양말과 신발까지 신겨주는 이상적인 결론을 얘기하진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한 손의 온기를 전하고 피곤하면 잠시 곁에서 쉬어가라고 말한다.

 



 

퀴어, 큐어로의 진화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늘 덜 자라 미숙한 성인이었다. 짝지어 등장하는 커플도 노동자-사장, 군대 선임-후임, 선생님-제자, 승무원-퀵서비스 배달원 등 사회적 시스템에서 더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와 복종해야 하는 자로 이분화 되어 있다. 한국사회는 강압과 계급,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속에서 소수자들은 결핍과 비밀이라는 그늘에 가려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인식이 늘 영화 속에 담겨있었다.

 

덜 자란 소년 같은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정말 소년의 이야기로 시선을 내리면서 이송희일 감독이 중, 고등학교 소년들의 성장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역시 두 가지 큰 선입견 앞에 서야 했을 것이다. 근간의 학교 폭력을 다루는 영화들이 공포 영화 혹은 스릴러의 장르에 빗대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핏빛 공포로 그려왔기에 생겨버린 장르적 선입견이 하나 있고, 두 번째는 감독의 전작들처럼 동성애를 그리는 퀴어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이송희일 감독은 이전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영화 속에 끌어들여 오면서,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 속에 학교라는 공간이 지니고 있는 시스템의 폭력성과 그 잔인함을 녹여 넣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이미 동성애자임을 인정한 성인 남성들이 지닌 필연적 열패감 대신 여전히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무르익지 않아 떠도는 퀴어적 공기를 영화 전반에 깔아둔다. 

 

이송희일 감독의 이전 작품 속 주인공은 어디론가 달아나거나, 달아나려 하거나,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시스템의 강한 그물에 걸리거나, 팽팽하게 당겨진 끈으로 묶여 그 구심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마주한다. <야간비행> 속 소년들은 늘 길 위를 떠도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해가 뜨는 순간에는 다시 학교라는 곳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폭력적인 조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이들은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꾼다. 중학생부터 용주(곽시양)와 기택(최준하)은 단짝이지만, 학교에서 그들의 처지는 너무나 다르다. 용주는 선생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엄마와 사이도 좋고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진 것 없는 기택은 반장 성진(김창환)이 주축이 된 무리들에게 수시로 괴롭힘을 당한다. 기택의 친구이긴 하지만 공부 잘하는 용주는 누구에게도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다. 용주, 기택에게는 중학생 시절 친했던 기웅(이재준)이라는 친구가 있다. 일진이 된 기웅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량 학생이 되었다. 늘 기웅에게 머무는 용주의 시선은 애틋하다. 그러던 어느 날, 용주가 게이라는 소문이 학교에 퍼진다. 용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야간비행

<야간비행> 스틸컷

 

<야간비행>의 관계는 학교라는 구조에 갇혀있기에 훨씬 더 좁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어린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그 미숙함 속에 우리가 우정과 의리, 배신과 연민이라 불리는 감정들 역시 서툴고 모호하게 그려진다. 확고한 신념이 없기에 지금 자신이 붙잡고 있는 권력도, 우정도, 관계도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등 돌릴 거라는 불안감이 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자신을 견고하게 지킬 방법이 배신이라고 믿는 아이도 있고, 폭력으로 자신의 약함을 위장하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강한 척 하지만, 늘 약하고 늘 혼란스럽지만 아닌 척 한다. 학교라는 조직은 아직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를 고민하고 정비할 최소한의 시간도,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권력 구도와 그 구도의 꼭짓점에서 손을 맞잡은 다양한 캐릭터는 복잡하지만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앞선 영화에서 이송희일 감독은 사회,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계급과 그 조건들 때문에 생겨나는 신파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 연출 스타일도 살아있어,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뭉클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순간들과 그 로맨스의 아련함도 담아낸다. 혼자 있는 순간, 따뜻해 보이는 가로등이 인물을 밝혀주고 밤이 오기 직전 활활 불타는 노을은 혼자 남겨질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적절한 순간에 흘러나오는 음악과 낭만적 정서는 여전히 로맨틱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교실이란 곳에서 번번이 지옥을 겪어야 하는 소년의 감정은 풋풋한 신인 배우들에 의해서 내밀하고 섬세하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기웅이다. 그는 용주의 마음은 냉정하게 거절하면서도, 그를 염려하고 그 주위를 맴돌면서 막상 용주의 곁을 떠나지는 못한다. 사랑이냐 우정이냐의 갈등에서 이송희일 감독은 혀로 핥아주는 좀 더 진한 우정이거나, 건조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는 사랑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감정이 우정이거나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기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모호해져버린 감정은 오히려<야간비행>을 좀 더 잠재적이고 열린 영화로 만들어 준다. 이미 너무 억압되고 단정되고, 단죄해 버리는 학교라는 시스템을 등지고 어떤 것도 규정되지 않는 미지의 상태여도 된다고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들여다 볼 시간도 없는 현실이 비극이 되어 버린 소년들이 맞이한 가장 지독한 순간에 멈춰버린 엔딩은 한동안 감정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이송희일 감독은 낙관적 관망에서 계속 달아나려고 하지만, 빗장 쳐 단단하게 가로막힌 시스템과 맞서기 위해서는 손잡고, 팔짱 껴서 작은 결속을 만들어야 한다는 역설로 그렇게 차갑고 시린 바닥에 맨 발로 선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정작 위로받아야 할 청소년들은 이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시린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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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가면의 쌩얼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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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것과 보이는 것, 가면을 쓰고 있어 더 잘 보이는 얼굴과 아무 것도 가려지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얼굴, 그 사이의 간극. <프랭크>는 가면을 쓴 천재 뮤지션과 재능 없는 작곡가 지망생 사이의 여정을 통해 간절한 열정과 타고난 재능의 다른 얼굴이 결국은 하나로 묶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희비극의 정서를 공유하는 영화다.<원스>를 시작으로 기대 이상의 흥행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비긴 어게인>처럼 뮤지션의 생활을 다루는 음악 영화이긴 하지만, 앞선 두 영화가 매끈한 종이에 질문과 해답을 적어주었던 것과 달리<프랭크>의 종이는 거칠다. 그래서 선명하게 찍힌 질문지 아래 답을 적어나가기는 조금 껄끄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프랭크>가 독해가 어렵다거나 오독할 만큼 잠재적이고 복잡한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는 얘기다. 




직장인 존(돔놀 글리슨)은 키보드로 곡을 만들어 보는 아마추어 작곡가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와 스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영감을 얻어 보려고 하지만, 몇 마디의 멜로디와 가사를 쓰기도 힘들어 하는, 그다지 재능은 없는 지망생이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인디 밴드 소론프로프브스에 키보드 주자로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존과 밴드 멤버들은 녹음을 위해 아일랜드 시골의 집을 빌려 단체 생활을 한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작곡방식, 괴짜처럼 보이지만 단단한 팀원들, 예측불허의 멜로디와 기이한 전자 사운드 사이에서 존은 그들과 함께이고 싶지만 어딘가 늘 한발 물러서 부유하는  듯하다. 소론프로프브스 밴드의 생활을 몰래 촬영한 존은 트위터와 유튜브에 올리고, 존이 올린 영상 때문에 이 밴드는 미국 음악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게 된다. 드디어 유명해진 기회를 얻은 이들, 클라라는 마지막까지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알려지는 것을 거부한다. 과연 이들의 공연은 성공할 수 있을까?


<프랭크>는 관객들에게 진기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가면을 뒤집어 쓴 프랭크를 중심으로 모인 밴드 멤버들은 어떻게 보면 프랭크처럼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이다.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 존도 음악 이외에 누구와도 쉽게 소통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프랭크가 뒤집어 쓴 가면은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 사이를 소통하게 만드는 가장 진실한 얼굴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조용하게 읊조린다. 그리고 그 관망 속에서 우리들은 프랭크의 가면을 벗기고 싶어 하는 존의 욕망에 동조하기도 했다가, 끝내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프랭크의 속사정에도 동조하게 된다. 


<프랭크>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예술가를 만난다. 빼어난 재능에도 세상과 단절된 채 소통하고 싶어 하지 않는 클라라, 천재 뮤지션이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그 방법을 도통 모르는 프랭크, 방법도 알고 소통도 하고 싶지만 재능이 없는 존. 이 예술가들의 욕망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만나고 그 얼굴을 바꾼 채 살아가는 일반인들의 욕망, 욕심, 혹은 좌절된 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세 가지 욕망은 화합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존은 모든 것을 망쳐버린 듯하지만, 다시 존을 통해 뭉친 멤버들은 이전과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 큰 깨달음을 얻은 존은 그들을 등지지만,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 <프랭크>를 다 컸지만, 역시 덜 자란 어른들의 성장담으로 봐도 무방한 이유다.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치유함을 기대하게 되는 다른 음악영화와 달리 <프랭크>는 기괴한 곡과 가사, 특이한 사람들로 가득한 영화다. 치유되거나 다시 듣고 싶을 만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노래는 없지만, 주인공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다독거리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은 충분히 공감 가능하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혹은 밴드를 소통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존의 선의는 외부의 공기와 만나면서 특이하지만 결코 나쁘지는 않은 밴드 멤버들을 ‘괴짜’, ‘미친 년’이라 불리게 만든다. 밴드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였지만 각자의 생활은 역시 각자 버티고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주장도 넌지시 건넨다. 관객을 치유하려는 정서적 움직임 대신, 치유되어 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나 역시도 살풋 미소 짓게 만드는 그런 힘을 가진 영화가<프랭크>이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수순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결말 역시도 파격적이진 않지만,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가장 순수한 표정을 드러내는 프랭크라는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나와 다른 개인의 삶과 그 태도를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랭크1.jpg



벗어도, 가려도 역시 마이클 패스벤더

 

<쉐임>에서의 전라 노출은 영화의 화젯거리였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섹스중독에 걸린 채 황폐해진 내면을 다스리지 못해 무너지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공허한 표정만 기억에 남긴다. 일명 미모낭비라는 우스개를 만들어낸 <프랭크>를 통해 마이클 패스벤더는 상영시간 거의 대부분을 가면을 쓴 채 등장한다. 가면 속에 마이클 패스벤더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가면 속 얼굴이 궁금해질 만큼, 그의 연기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우리는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다양한 표정을 영화 속에서 만날 수 있다. 2015년 <맥베스>는 물론 2016년까지 필모그래피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또 보고 싶은 배우가 마이클 패스벤더다. <어바웃 타임>의 귀여운 주인공 돔놀 글리슨은 순박하고 귀여운 매력으로 어쩌면 밉살스러울 수 있는 밴드의 훼방꾼을 사랑스럽게 만들어 낸다.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 매기 질렌할은 까칠하고 폐쇄적인 클라라로 분해 갈등을 조장하고 봉합한다. 영화가 필요이상으로 점점 길어지는 요즘, 1시간 30분이라는 적당한 러닝 타임을 탄탄하게 조여 주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지만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기괴하다고 생각되지만,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프랭크>의 음악 역시 중독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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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양심을 훔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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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일이다. 나 스스로는 온전히 내 마음의 주인인 것 같지만, 내 마음은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처럼 순식간에 주인을 바꾼다. 스스로 비겁하다고 느끼지만 용기를 내면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하고, 동정심을 마음 한켠에 품고 있지만 내 욕심을 위해서는 마음을 등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반면 양심이라 불리는 마음의 표정은 꽤나 강직한데, 그 강직한 마음의 표정을 끝내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임순례 감독의<제보자>는 그럼에도 그 강직한 마음의 표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화법은 꽤 믿음직하고 설득력 있다. 하지만 끝내 설득되었느냐는 질문에 모두 만족스러운 답을 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윤민철(박해일)은 방송국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PD이다. 그에게 제보가 들어온다. 인간배아줄기세포 복제 성공으로 유명해진 생명공학계의 영웅 이장환(이경영) 박사의 연구 발표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복제 성공한 줄기세포도 없고, 논문 역시도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제보자는 이장환 박사팀의 팀장으로 일하다 최근에 탈퇴한 심민호(유연석)라는 사람이다. 제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던 윤민철은 결국 사건을 파헤치고, 심민호의 말처럼 이장환 박사의 거짓말 뒤에는 거대한 조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장환 박사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훨씬 더 크고 단단하게 결속된 조직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그들은 묻는다. 진실이냐, 국익이냐?  


줄거리만 봐도 알겠지만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는 2005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박사’의 스캔들을 소재로 한다. 벌써 10년 전 사건이라 희미해진 부분도 있지만, 국민의 영웅에서 사기꾼으로 전락한 한 인물과 국가가 기만당한 희대의 사기극의 충격은 여전하다. 실화를 소재로 했고, 논쟁이 될 만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제보자>의 최대 장점은 호들갑을 떨지 않고 묵묵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등에서 격한 이야기를 하지만, 감정의 과잉을 최대한 자제해온 임순례 감독의 차분한 연출력과 늘 사회적 문제가 되는 화두를 깊이까지 고민하는 철학은 영화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박해일은 늘 피곤에 절어 있지만, 진실을 향한 눈빛만을 살아있는 PD 역할을 제대로 해 낸다. 인기 급상승 중인 유연석 역시 내면의 갈등에 빠진 제보자 역할을 기대한 만큼 잘 치러낸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인물은 이경영이다. 최근 아주 많은 영화 속에서 그를 볼 수 있지만 ‘또 이경영?’이 아니라 ‘역시 이경영!’이라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그의 연기는 영화 속에서 날을 세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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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건은 여전히 재판이 진행 중이고, 사건의 전말은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다. 희대의 사기극으로 단정 지은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줄기세포와 황우석에게 희망을 걸고 그를 믿고 지지하는 후원회의 활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명예훼손 등의 법적 분쟁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아주 오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명량>의 경우, 예상치 못하게 배설 장군의 후손인 경주 배씨 문중이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바 있다. 누가 봐도 황우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제보자>가 “본 영화는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픽션임을 밝힙니다”라는 고지와 함께 시작되는 이유다.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실화가 주었던 충격과 선입견 사이에서 이건 픽션이라며 선긋기를 하는 순간들을 보인다. 이를 위해 임순례 감독이 택한 방법은 ‘사기사건’이라는 이슈를 뒤로 미루고, 그 이슈가 숨긴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언론인의 의지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도가니>,<부러진 화살>, <변호인>등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들이 사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사회의 불합리함을 고발하고, 사회적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 것과 달리 <제보자>은 ‘진실 찾기’라는 주제를 위해 ‘황우석 스캔들’을 소재로 사용하면서 조금 뒤로 물린다.


영화는 픽션을 강조하면서 조금 더 극적인 순간들을 만들어 내고, 인물들의 성격도 입체적으로 조각해 낸다. 임순례 감독은 이장환 박사에게도 인간적 고뇌를, 양심에 따라 제보를 한 심민호에게도 내면의 갈등을 허락한다. 고민 없이 진실만을 향해 뻗어나가는 유일한 사람은 언론인 윤민철 한 사람 뿐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언론인의 자세, 언론의 역할, 그리고 그 태도에 대해서 강직한 얼굴을 좀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나 박진감 넘치는 커트와 다양한 앵글이 영화에 조금 더 흥미로운 상업성을 씌운다. 그런데 이상하다. 화두는 명확하고, 주제도 단선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마음이 동요하진 않는다. 언론과 정권의 유착관계와 그 거짓들 사이에서 기만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에 종종 답답한 한숨을 쉬게 되지만, 이미 한국사회의 병폐들이 이미 정점을 찍고 나락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지금, 조금 더 결정적인 한방을 날려줬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 감정은 <제보자>라는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 당최 신뢰할 수도 믿어지지도 않는 언론의 행태와 답이 보이지 않는 한국사회에 대한 울분 때문이다. 누구라도 속 시원한 해답을 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인사이더>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는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라는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더욱 강한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기 위해 영화는 수많은 담배회사와 사람들의 실명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담배산업을 주축으로 언론과 기업의 유착관계, 기자와 정보원 사이의 뒤엉킨 관계 속으로 깊이 침투한다. 어렵게 취재한 뉴스가 언론과 담배회사의 유착관계로 방송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사표를 던지고 떠나는 알 파치노의 행보에는 비장함이 넘친다. 그는 스스로 <CBS>의 내부 사정을 <뉴욕타임즈>에 밀고하는 인사이더가 되어 자신의 인사이더인 와이갠드를 지켜낸다. 그의 행동은 우직하게 진실을 지키려는 고집이기도 하다.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는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어 감동을 주려는 욕심을 최대한 자제하고, 진실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내밀한 설득력과 긴장감을 유지한다. 2시간 45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이 무리 없이 설득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진실로 가는 길은 그토록 길고 장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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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건조하게 바스락거리는 봄의 추파(秋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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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어가 가진 원래의 뜻과 달리 세속적인 의미가 훨씬 더 낮아지는 경우가 있다.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 혹은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은근히 보내는 눈길이라는 뜻을 가진 추파(秋波)라는 단어가 그렇다. 단어가 가진 원래의 뜻은 좀 더 은은하고 설레는 느낌이지만,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단어의 어감은 조금 즉물적이고, 세속적인 느낌이 강하다.<마담뺑덕>이란 영화가 주는 느낌이 아쉽게도 그렇다. 추파의 서정적인 원뜻에서 시작해, 세속적인 이해로 끝나버린 달까?


임필성 감독은 2007년,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헨젤과 그레텔> 이후 7년 만에 다시 한국의 고전을 현대로 불러들였다. 당시 흥행이나 평가 모두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지만, 어른들이 만들어낸 공포에 짓눌린 아이들이 다시 공포의 주체가 된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영화였다. 그런 점에서 <심청전>의 악역이자 조연이었던 뺑덕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마담뺑덕>은 색다르고 재미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정우성의 첫 노출이라는 자극적인 이슈와 색다른 매력을 가진 이솜이라는 배우에 대한 기대가 더했다. 


취미에 눈뜬 남자, 집착에 눈먼 여자



기대한 만큼 <마담뺑덕>의 도입부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지방 소도시, 세련되고 퇴폐적인 중년 남성, 그리고 순진하고 멋모르는 한 처녀의 사랑. 물처럼 고여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일상 속에 다가온 남자의 매력에 빠진 순진한 처녀는 사전적 의미에서의 ‘추파’를 던진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첫사랑의 매혹과 거칠 것 없는 집착, 마음과 육체가 함께 열리는 이 순수한 열정은 뭔가 아슬아슬하지만 편을 들어주고 싶은 정서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우리는 순수한 덕이의 몸과 마음이 곧 누더기가 되리란 걸 안다. 시골 생활을 따분해 하는 학규에게 친구가 툭 던지는 한 마디, “뭔가 취미라도 가져봐.” 그때 오버랩 되는 덕이의 클로즈업된 얼굴. 딱히 나쁜 남자 같지 않지만, 학규에게 덕이는 사랑하는 여인이 되진 못한다. <마담뺑덕>은 이렇게 지루한 일상의 ‘취미’로 여자를 취한 남자와 깊은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여자의 어긋난 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앞으로 벌어질 치정극의 불길한 기운을 꽤 매혹적으로 깔아둔다.


기대했지만 문제는 화재로 엄마를 잃은 덕이와 자살한 아내 덕에 홀로 청이를 키워야 하는 학규가 재회하는 8년 뒤, 본편으로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중심을 잃어버린다는데 있다. 이제부터 모티브를 따온 <심청전>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덕이와 학규의 관계 속에 ‘청이’가 섞이는 순간, 이야기는 점점 더 인위적으로 가공된다. 익숙한 원작의 이야기와 그것을 접목시키는 방법에 대한 궁금증은 <마담뺑덕>을 끝까지 궁금하게 만드는 덕목이기도 하다. 특히 ‘공양미 300석에 팔려간 청이가 금의환향하여 아비의 눈을 뜨게 하는’ 장면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되살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이 현실이 되는 기법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설화의 판타지에서 용인될 수 있었던 사건들이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으로 이어지는 순간, 이야기의 균형도 매혹도 윤기를 잃어 바스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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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 이솜이 보여주는 연기는 신선하다. 순수와 열정이 뒤섞인 묘한 표정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버린 여자의 마음을 보여준다. 장애인 엄마에게 더 없이 착한 딸이지만 사람이 찾지 않는 놀이공원 매표소 안에서 인생의 따분함을 견뎌야 하는 덕이가 서울에서 온 중년 남성에게 푹 빠져버리는 과정은 이솜이라는 배우가 가진 다양한 매력 때문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느새 중년 남성의 진중한 모습으로 다가선 정우성도 한마디로 인생 격변을 겪어야 하는 학규가 되어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속물근성을 숨기고, 우아한 척 하지만 퇴폐적인 교수에서 시력을 잃고 나락에 빠지는 학규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는 충분히 성숙해 보인다. 조금 아쉬운 점은 덕이가 사랑에 빠진 학규의 모습은 여전히 너무 매력적이어서, 두 사람의 화학작용이 불륜의 아슬아슬함 위를 거니는 느낌 보다는 자연스러운 연정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아쉬운 점은 끝내 이야기를 설득하려 하는 두 사람의 멋진 연기 위로 균형을 잃은 이야기의 부스러기가 뒤덮인다는 점이다.  


‘눈이 먼다’라는 <심청전>의 이야기는 <마담뺑덕>에서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랑에 눈 먼, 욕정에 눈 먼, 복수에 눈 먼, 어떤 것으로도 적용 가능하다. 하지만 학규가 물리적인 자극으로 정말 눈이 먼 순간, 심정적으로 사랑에 눈을 뜬다거나 속죄의 마음에 눈을 뜬다거나 하는 대비도 상징적이고 효율적으로 쓰였다면 조금 더 효과적인 복수 치정극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다시 관계가 역전되어 물리적으로 눈 먼 덕이와 눈을 떠버린 학규의 관계가 조금 더 애잔한 로맨스로 남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쁜 예술의 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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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예술의 관능, <킬 유어 달링>


지금 현재의 내 삶에 미래도 탈출구도 없어, 숨이 꽉 막힌다고 생각하는 청춘이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순응하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예 달아나버리거나, 제도에 맞서 싸우는 일일 것이다.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피와 반항이 짝패가 되는 순간, 삶은 관능과 퇴폐에 휩싸이기 쉬워진다. 술, 마약, 섹스 등을 통해 매일 밤 좌절의 밤을 견디고, 금기된 것들에 도전하는 사이 관능적 삶이 만들어낸 퇴폐는 삶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 문학계를 흔들었던 비트세대의 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 <킬 유어 달링>은 무의미의 세대를 겪어온 청춘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드러내는 영화다.  



비트세대란 1920년대 대공황이 있었던 상실의 시대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체험한 세대로 전후 50년대와 60년대의 삶에 안주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냉정하게 버려졌다고 생각하면서, 동시대 사회와 문화구조에 저항한 특정 문학가와 예술가의 그룹을 지칭한다. 비트세대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시집 「울부짖음(Howl)」(1956)을 통해, 혼란스럽고 외설스러운 비트 세대의 작품과 달리 강한 힘과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킬 유어 달링>은 틀에 박힌 제도권의 권위와 무감각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세웠던 비트 세대 작가의 출발을 담은 영화다. 영화의 관점은 앨런 긴즈버그(대니얼 래드클리프)와 그의 작품에 영감을 준 뮤즈 루시엔 카(데인 드한)의 관능적이고 날카로운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하는 것들을 죽인’ 다음에야 성장이라는 단계를 밟아가는 청춘의 운명을 동정한다.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에게서 달아나 콜롬비아 대학에 진학한 앨런은 자유롭고 퇴폐적인 매력을 지닌 루시엔 카에게 한 번에 매료된다. 루시엔의 매력에 중독되듯 빠져드는 앨런은 ‘뉴 비전’이라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시작한다. 이들은 정말 뜨거웠지만, 그 열정은 활활 불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꽃처럼 짧지만, 서로의 마음에 짙은 화상을 남긴다. <킬 유어 달링>은 노골적이지 않은 퀴어 영화의 공기로 가득한데, 흔히 작품에 영감을 주는 뮤즈의 자리를 치명적 매력을 지닌 남자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시엔과 앨런 사이에 감도는 정서적 농도와 은밀하게 흐르는 눈빛의 화학반응은 분명 야릇한 연애담처럼 펼쳐지지만, 영화는 혹은 두 배우는 계속 한발 물러나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데인 드한이 내뿜는 퇴폐미와 야릇한 눈빛, 그리고 계속해서 앨런에게 섹슈얼한 관계의 곁을 주는 행동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팜므 파탈의 역할을 했던 여배우가 내뿜는  농염의 공식을 따른다. 그런 루시엔의 캐릭터는 데인 드한이라는 배우를 만나. 앨런뿐만 아니라 관객까지도 퇴폐의 아름다움과 그 정념의 곁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청춘과 몽환적 분위기에 충분히 매혹은 시켰지만, 루시엔이 지니고 있던 비밀과 앨런과의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의 교류에 깊이가 더해지지 않아, 영화는 더 짙은 관능과 나쁜 예술이 주는 생채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짝 주춤거린다. 


하지만 두 배우의 화학반응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정서는 연출이 메우지 못한 허점 사이를 유연하게 채운다. 우선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변신은 성공적이다. 해리 포터라는 영특한 소년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그는 아주 많은 노력을 했다. 미성년자이지만 전라 연기를 감행했던 연극 <에쿠우스>를 비롯하여, 성인이 되어 실체가 없는 공포에 맞서는 <우먼 인 블랙>을 통해 서서히 자신의 얼굴에서 마법 소년의 이미지를 지워갔다.<킬 유어 달링>은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성인이 된 자신의 얼굴과 연기를 보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반짝반짝 빛날 것만 같던 청춘의 그늘과 날카로운 칼에 베이고서야 훌쩍 성장할 수 있는 자신의 20대처럼 고뇌하는 작가 앨런의 캐릭터를 통해 그는 꽤 자연스럽게 해리 포터가 아닌, 대니얼 래드클리프라는 배우가 되었다. 지금, 현재 가장 뜨거운 배우 데인 드한의 매력은 시쳇말로 치명적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을 중독 시키지만 손을 뻗어서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은 매혹이 데인 드한을 아우라처럼 감싼다. 동시에 여전히 덜 자란 것 같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몸매는 어딘지 모를 보호본능을 자아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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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비트세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모르더라도, <킬 유어 달링>은 충분히 즐길만한 복고적 정서와 세련된 분위기로 가득한 영화다. 1950년대 뉴욕의 풍경은 낭만적이고, 주인공들을 감싸는 재즈 음악은 퇴폐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더한다. 실제 이들이 콜롬비아 대학 도서관에 잠입하는 장면은 뉴욕대학 도서관에서 촬영, 1940년대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고, 고전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대니얼 래드클리프와 데인 드한의 연기는 자기들끼리 화학작용을 더하면 생생하게 살아있다. 손대면 베어버릴 것을 알면서 손을 뻗게 만드는 나쁜 예술을 상징하는 루시엔을 통해, 생채기를 내는 나쁜 예술의 매혹을 더 깊이 드러내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데인 드한을 통해 매혹될 수밖에 없는 ‘나쁜 남자’ 혹은 ‘나쁜 뮤즈’가 주는 예술적 영감의 정서는 다행히도 생생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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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훌쩍 자란 시간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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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을 쓰다 보니, 볼만한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막상 추천하고 나면 주로 고맙다는 소리를 못 듣는 편이라, 어지간하면 알아서 취향대로 보시라고 둘러대는 편이다. 하지만<보이후드> 덕분에 누구에게도 망설임 없이 권할 수 있는 추천작 하나가 생긴 것 같다.<보이후드>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모사’의 속성 위에 ‘다큐멘터리’가 가진 일상성과 진정성을 덧입혀 이제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동을 선사한다. 실제 12년 동안 성장한 주인공 메이슨 주니어와 함께 12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내 가족과 친구의 세월을 바라보는 것 같은 감흥을 준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 담겨진 사회의 변화도 흥미진진하다. 12년이란 세월을 신뢰와 믿음이 없었다면 함께 할 수 없었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스태프의 노력과 끈기는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니 마치 어느 날 12년이란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랄까.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비포 미드나잇>시리즈를 통해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19년의 변화를 겪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를 관객에게 선물하면서, 19년의 세월을 마치 친구처럼 공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더 큰 일을 벌였다. 12년 동안 촬영이 진행되는 영화를 기획한 것이다. 그렇게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2년 동안 캐스팅된 배우와 제작진은 단 한사람의 변화도 없이 촬영에 임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12년 동안, 매년 배우와 제작진을 만나 15분 분량씩을 촬영했다. 시나리오는 매 해 변화에 맞춰 새롭게 쓰고 편집했다. 가장 큰 모험은 12년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남자 주인공의 선택이었다. 텍사스 주에서 6살 엘라 콜트레인을 골라낸 감독은 실제 시간의 흐름과 실제 사람의 성장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감당하면서, 기어이 <보이후드>를 완성해 냈다. 


스토리는 특별할 게 없다. 여섯 살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와 그의 누나 사만다는 싱글 맘 올리비아(패트리샤 아케트)와 텍사스에 살고 있다. 아빠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메이슨과 사만다를 데리고 캠핑을 가거나 야구장에 데려 가며 친구처럼 놀아주지만 함께 살 수는 없다. 엄마의 일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메이슨은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똘똘하고 귀여운 엘라 콜트레인은 다행히 매력적인 소년으로 자라난다. 아역배우들의 성장과 함께, 에단 호크와 패트리샤 아케트는 어느덧 중년이란 나이가 어울리는 나이로 똑 같이 나이 들어간다. 심리적 성장을 대리 경험하게 하는 성장영화의 틀 안에 ‘진짜 성장’의 과정을 담은 셈이다. 메이슨 주니어를 중심으로 그렇게 <보이후드>는 그의 주변인물, 특히 가족들의 성장과정도 함께 담아낸다. 


12년이란 세월은 메이슨 주니어에게는 성인으로 자라나는 시간이지만, 그의 엄마 올리비아는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 그리고 마침내 교수가 된다. 그녀는 이혼한 전 남편 이외에도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졌다가 눈물짓는다. 메이슨의 누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따라하는 발랄한 소녀에서,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메이슨과 다른 시간 속을 살아간다.<보이후드>는 메이슨의 성장영화이지만, 관객의 관점에 따라 다른 성장담을 담는다. 누나 사만다의 시점에서 보자면 <Girlhood>가 될 것이고, 올리비아를 중심으로 보자면, 싱글 맘의 작은 성공담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발 물러나 지난 나의 이야기를 돌이켜 보자면, 또 나의 지난 시절에 대한 회고담으로도 읽힐 수 있다. 

  

<보이후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인물들의 성장담과 함께 2002년부터 2013년, 영화 속에 담긴 12년 간 미국 대중문화의 다채로운 변화다. 메이슨이 가지고 놀던 게임기가 닌텐도였다가 훗날 위로 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를 변화시킨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같은 온라인 매체의 등장과 그 변화도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담긴다. 또한 12년 동안 메이슨과 함께 자라난 연도별 팝 음악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영화 속 음악들은 그 당시의 문화상을 담아, 그 또래 소년들이 주로 들었던 노래들로 선별해 넣었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메이슨 역할의 엘라 콜트레인에게 또래들이 자주 듣는 음악에 대해 조언을 구했지만, 엘라가 워낙 복고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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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시련을 거치고, 훌쩍 어른이 된다는 성장담은 여러 픽션들 속에서 그려져 온 일종의 판타지이다. 먼지처럼 수많은 별 볼일 없는 시간이 쌓여 언제 나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훌쩍 자라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렇게 성장은 역시 일상의 한 과정이다.<보이후드>는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메이슨의 성장을 통해, 촘촘하게 이어진 일상이 지금의 나를 이뤄낸 작은 발판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메이슨의 엄마는 떠나는 메이슨을 향해 삶이 끝나는 것 같다고 울부짖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그런 헤어짐 역시 새로운 시작이고, 우리 삶은 계속 이어져갈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남루하고 초라하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도, 내 삶은 남들과 달리 특별한 것이 없다고 비관하는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에게 내일은 찾아온다는 것을…….그리고 영화 <보이후드>는 말한다. 훌쩍 자라난 시간 동안,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어쩌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당신의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보이후드>는 관객들에게 시간을 선물하고, 그 시간을 되짚는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과 시간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진하게 소소한 나의 시간에 박수를 쳐본 적이 있는가? <보이후드>와 함께 나의 과거에도 박수를 쳐주자. 당신의 시간은, 나의 시간은 그렇게 박수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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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된 시간의 상실과 그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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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억상실이란 소재는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꽤 구태의연하게 사용되어 식상한 감이 있지만, 선입견을 내려놓고 보면 꽤 묵직하고 철학적일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어느 날 기억이 멈춘 나를 발견할 때의 공포를 상상해 보라. 젊고 팽팽하고 예쁘던 얼굴이 아닌, 늙어버린 얼굴로 깨어나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내가 잠들기 전에>는 지금 현재에 우뚝 선 내게 공유된 시간이 뭉텅 사라져 버린 순간의 그 공포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여기에 한 가지 철학적 질문이 붙는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기억의 복원, 그 불완전함

 

우리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의 한 마디에, 우연히 듣게 된 노랫말에 우리의 기억은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영화의 점프 컷처럼 구성된 우리의 기억은 편집이 화려한 영화처럼 역동적이지만,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전혀 맥락이 없는 화면처럼 보인다. 오늘의 내가 있는 이유는, 아마 어제 잠들기 전의 나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사라진 후, 도저히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의 공포는 어쩌면 근원적이다. S. J. 왓슨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로완 조페 감독은 <내가 잠들기 전에>는 기억의 불완전함과 현재의 나 자신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주인공 크리스틴(니콜 키드먼)은 40대 주부지만, 20대에 기억이 멈춰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난생 처음 보는 남편 벤(콜린 퍼스)과 중년이 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놀라는 일이 그녀에게는 일상이다. 벤은 끈기 있게 크리스틴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그녀는 매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무언가 남편의 태도에는 비밀이 감춰진 듯하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한 후 정신과 상담의라는 내쉬 박사(마크 스트롱)가 전화를 걸어 침대 서랍장 아래에 카메라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에는 ‘벤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찍혀 있다.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내가 잠들기 전에>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아무도,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암흑 같은 기억 속에서 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 주위의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미스터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어느 날 툭 낯선 현실에 떨어진 크리스틴의 기억은 백지 상태이다. 역시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관객들은 크리스틴과 함께 이 기억이라는 미스터리, 나의 존재를 찾아가는 미로 게임에 동참하게 된다. 니콜 키드먼의 신경병적인 연기와 콜린 퍼스의 뭔가 미심쩍은 듯한 분위기는 영화를 더욱 긴장감 넘치게 만든다. 알 듯 말 듯한 기억의 파편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파생되는 팽팽한 강박 역시 중반까지 꽤 내밀하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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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내가 잠들기 전에>가 더욱 기대되었던 이유는, 주인공이 매일 눈을 뜨자마자 스스로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매일 인식해야 하는 비관적이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강박증에 빠진 병약한 크리스틴은 과거의 자신을 유추하거나, 과거의 자신이기를 희망하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자신이 과거에 나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는 공포, 자신의 과거가 기대 이하였다는 답을 들을 때마다 좌절되는 그녀의 모습은 병적인 아픔을 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아주 많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남편과 의사, 이 모두를 믿을 수 없다. 이들 역시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완전히 타인이다. 그들과 어떤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지, 어떤 시간을 함께 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완전한 공포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런 긴장감이 반전으로 이어져, 관객과의 두뇌게임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너무나 평이해 진다는 것이다. ‘모성’으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뭉클한 감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 동안 쌓아왔던 것들에 비해 너무 쉬운 답안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러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내가 잠들기 전에>는 가장 두려운 순간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공유한다. 극적 재미를 위해 반전과 비밀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지만, 크리스틴이라는 여인과 함께 단절된 하루하루를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녀의 인생에 아무런 희망도 없을 거라는 인식은 좌절감을 안긴다. 어쩌면 내 인생도 그럴 수 있다는 좌절이야 말로 이 영화가 주는 가장 뚜렷하고도 확고한 공포다.

 

 

 

● 함께 보면 좋을 영화<헨리의 이야기>

 

기억시간 15분이라는 소재로 기억상실에 대해 가장 창의적인 변주로 기억되는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0년 작품 <메멘토>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4년<이터널 선샤인>은 자신의 의지로 기억을 지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멜로, 로맨스로 풀어낸 흥미롭게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이외에도 기억상실에 대한 영화는 다양하지만, 그중 <내가 잠들기 전에>와 함께 비교해 보면서 봐도 좋을 작품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1991년작<헨리의 이야기>다. 아름다운 아내와 딸을 가진 뉴욕 최고의 변호사.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수록, 과거의 나는 내가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거를 되짚어 가는 과정이 미스터리한 재미가 있고,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이 최고의 미덕임을 강조하는 결말도 억지스럽지 않다. 당시 꽃중년 해리슨 포드와 30대였던 아네트 베닝의 모습이 너무 풋풋해서 반갑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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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되어 ‘놀란’ 감성의 피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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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마이클 베이 감독의<아마겟돈>이 떠오른다면 당연히 잊어도 좋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터스텔라>는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영화다. 상상 그 이상을 실현시켜 보여주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망설임이 없다. 당연히 169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에도 지루할 틈이 없다.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는 물론이고, 가족과 사랑의 가치를 녹여낸 이야기도 억지스럽지 않다. 하지만 이 경이롭고 숨 막히는 5차원의 공간과 과학적 상상력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이상하게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결론처럼 말하진 않겠지만, 이유를 알 것 같다. 놀란의 감성에 놀란 관객들에게 감독은 촘촘하게 꽉 짜인 이야기와 결말을 툭 던져주고, 다른 결말을 기대하거나 상상할 틈을, 즉 관객들이 좀 놀고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떨어지는 순간을 즐겨보려고 자이로드롭을 탔다. ‘에잇! 눈 감았어!’

 

 

 

재난을 극복하는 영웅담에서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경향은 재난 그 이후를 향하는 것 같다.<인터스텔라>는 인류의 멸망을 목전에 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극심한 환경 파괴로 식량 부족 상태가 된 지구는 농업사회로 회귀된 상황이다. 전직 우주비행사지만 지금은 농부인 쿠퍼(매튜 맥커너히)는 아내가 죽고 두 남매를 홀로 키운다. 그러던 어느 날 쿠퍼와 딸 머피는 이상한 신호를 발견하고 그곳을 향한다. 해체된 줄 알았던 NASA가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다. NASA는 지구를 대체할 수 있는 행성을 찾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쿠퍼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우주 탐험에 동참한다.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 과학자들이 선택한 것은 ‘웜홀’이다. 웜홀을 통해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우주로 향한다.

 

<인터스텔라>의 승부수는 웜홀이라는 과학적 가설과 상대성 이론이라는 물리학이다. 하지만, 과학을 동원한 상상력으로만 끝난다면 놀란 감독이 아니다. 그는 과학적 상상력이 발현된 SF에 인간 사이의 관계, 그 내밀한 소통이라는 이야기를 주입한다. 이를 위해 <인터스텔라>는 상대성 이론을 근거로, 인물 사이의 마주선 관계를 들여다본다.


우주에 나간 사람들과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그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주에서의 1시간이 지구의 7년이라는 가설에 따라, 우주로 향한 대원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지구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은 20년의 세월을 보낸다. 우주와 지구라는 그 사이, 가족이라는 단단한 구심점으로 이어진 인물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밀어내도 다시 원심력을 타고 절박하게 서로를 향해 되돌아온다. 4차원과 5차원이라는 공간 속을 유영하지만, 놀란 감독은 그 사이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를 단단하게 매듭짓는다. 우주에서 유영하는 이들도, 지구에 남아 이들을 기다리는 가족들도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고 기다리겠다는 마음은 한결 같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 전 캐스팅 된 매튜 매커너히의 캐스팅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놀란 감독은 이미 크리스천 베일을 배트맨으로, 히스 레저를 조커로 캐스팅하고,<인셉션>에 조셉 고든 래빗을 캐스팅하는 등 배우를 보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인터스텔라>캐스팅 이후 촬영된 <달라스바이어스클럽>을 통해 매튜 매커너히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연기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카우보이모자를 벗어던진 그에게 당당한 가장의 모습도 제법 잘 어울린다. 여기에 놀란 감독이 선택한 캣 우먼이었던 앤 해서웨이는 모험심 강한 과학자이자, 인간적인 사랑을 간직한 섬세한 여성의 매력을 선보인다. 한스 짐머의 음악은 늘 그랬듯 극적 몰입도를 배가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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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음향효과 없이 줄곧 고요한 순간이 오히려 박진감을 주었던<그래비티>를 통해 침묵과 고요함이 던져주는 절대적 압도감을 느껴본 관객에게 <인터스텔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압도감을 선사한다. 여기에 광활한 우주에 던져진 인간의 두려움과 외로움까지도 담아내면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이끈다. 방대한 스케일이 우주의 공간을 담아낸다면, 놀란은 그 속에 담긴 인간에게는 소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을 허락한다. 스펙터클을 좋아하는 관객도, 잔잔한 드라마를 선호하는 관객도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전략이다.

 

미래 지구의 모습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정말 그런 시절이 닥친 것 같고 광활하면서도 적막한 우주의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우주 SF라면 흔히 상상되는 괴생명체나 외계인도, 이들을 위협하는 악의적인 적도 폭력도 없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직조해 내는 놀란의 연출력은 기대한 만큼 훌륭하다. 하지만, 눈 질끈 한번 감았더니 끝난 놀이기구처럼 관객들의 상상력이 개입한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이게 정답이야, 라는 놀란 감독의 결말에 설득될 수 있는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길 권한다. 보수성향이 강한 놀란 감독은<인터스텔라>에도 소시민의 반란과 역할은 절대적으로 막고, 절대 영웅과 가부장제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드러낸다. 물론 영화 전체를 무겁게 짓누를 지경은 아니다. <인터스텔라>의 연출은 스필버그가 맡으려고 했다. 놀란 감독은 영화 속에 다른 피를 수혈했겠지만, 스필버그라면 당연히 보여주었을 따뜻한 감성과 가족애를 놀란도 나름의 방식으로 품어보려한 것은 확실하다.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답게, 관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힌 다양한 상영방식을 제공한다. 35mm 필름 상영본은 물론 아이맥스, 2D 디지털, 4D 등 취향에 따라 골라볼 수 있는 것도<인터스텔라>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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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 담은 ‘우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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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결론이라는 건 없다. 우리는 낭만적인 믿음으로 방관하며 살 수 없는 시대 앞에 섰다. 19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을 선택한 전태일 열사가 사망한지 44년 후 2014년 11월 13일, 아이러니하게도 대법원은 쌍용자동차의 노동자 대상 정리해고는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6년을 싸워온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절규한 날이었고, 마침 수능시험 날이었고,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영화<카트>는 그 날 관객에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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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이 아닌 형평에 대하여

 

44년의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대체 누구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살아왔던 것일까? 의지할 곳도 안길 곳도 없이 우리 사회의 등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하는 걸까? 노동문제를 품은 최초의 상업영화로 불리는<카트>는 호들갑스럽지 않게, 그리고 과격하지 않게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의 현실을 들여다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부당함 속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의 외로운 투쟁은 엄연한 현실이다.<카트>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 속 내 이웃,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이다.

 

<카트>는 주말이면 커다란 카트를 덜덜 끌면서 대형 마트를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가 수도 없이 스쳐지나 만나는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만나왔던 그들이 사실은 심한 육체노동과 함께 감정노동까지도 견뎌야 하는 노동자라는 전제가 영화의 시작이다. 영화의 시작에 우리는 소수의 정규직 직원과 자주 선 채 ‘여사님’이라 불리는 대형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하루를 함께 한다. 5년째 모범사원으로 인정받아 정규직 전환을 앞둔 선희(염정아)는 누구보다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하는 비정규직 사원이다. 싱글맘 혜미(문정희), 청소원 순례(김영애),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는 20대 미진(천우희) 등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각자의 입장은 다르지만 거친 강도의 노동을 견뎌내는 비정규직 사원들이다. 어느 날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 그들에게 해고는 생존의 위협이다. 누군가의 선동 없이, 뜻을 모은 비정규직 사원들은 혜미를 중심으로 노조를 꾸리고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을 시작한다. 예상대로 회사는 회유를 통해 분열을 조장하고, 생계가 어려운 노조원들은 자연스럽게 이탈의 과정에 선다. 정규직 사원인 동준(김강우)은 노조 편에 서서 그들을 돕는 역할을 하고, 해고의 수순을 맞이한 정규직 사원도 가세하면서 노조의 힘은 순간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대 회사를 상대로 한 약자들의 싸움은 이상적 결론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영화 <카트>의 가장 큰 장점은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한 명의 영웅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투쟁하여 승리하자는, 노동운동의 슬로건에 연연하지 않는 유연함에 있다. 부지영 감독은 다양한 인물들의 처지와 개인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나누면서 이들의 투쟁을 선동하거나 강하게 주장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만든다. 또한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의 처지를 혀로 핥아주는 조금 더 따뜻한 연대감을 나누게 만든다. 여기에 주인공 선희의 아들(도경수)에게 미성년 노동자의 역할을 더한다. 감동적이지만 작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간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노동문제는 해결되지도, 그 부당함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노동자의 인권이, 그리고 그 모독의 시간을 견뎌온 우리 모두가 이 이야기를 함께 나눠야 한다고 나지막하게 설득한다.

 

  “아이들을 지켜주는 신은 따로 있어.”

 

두 번 반복되는 이 대사가 무색하게, 혜미의 아들은 과잉진압 과정에서 큰 부상을 당하고, 선희의 아들은 편의점 사장에게 억울한 폭행을 당한다. 이를 통해 부지영 감독은 신에게 위탁된 낙관 대신, 지금 우리들이 우리 아이들을 지켜줄 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태일 열사 분신 44년 전과 후, 사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바로잡지 않으면 늘 효율성이라는 명목 하에 무시되고 묵과해온 ‘형평성’을 상실하게 되리란 메시지를 아이들의 현실에 접목하는 연출력은 꽤 자연스럽다. 

 

그렇게 <카트>는 사회적 부당함을 부각시켜 공분을 자아내게 하기 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에 공감하게 만드는 많은 이야기들을 품어내면서 공감이라는 정서를 만들어내는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분노가 아닌 공감의 눈물이었고, 그런 마음으로 부당함에 고통 받는 내 이웃을 돌아보자는 영화의 메시지는 성공적으로 마음에 안착한다. 쌩얼을 두려워하지 않는 염정아의 새로운 얼굴이 신선하고, 어느새 믿고 보는 배우가 된 문정희와 중견배우 김영애, 황정민은 영화의 중심을 든든하게 잡고, 너무 많은 인물을 보여주느라 분산된 카메라의 시선 안에 든든하게 캐릭터를 잡아준다. 엑소의 아이돌 멤버 D.O로 알려졌지만, 신인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이 빛나는 도경수는 <카트>에서 신선함을 맡았다. 도경수 덕분에 10대 관객이 많다는 것도,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메시지가 전달되리란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게 만드는 순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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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야기, 그 절반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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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헝거게임 : 판엠의 불꽃>으로 점화된 시리즈는 2013년 <헝거게임 : 캣칭 파이어>로 이어졌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수잔 콜린스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시리즈의 종결판<헝거게임 : 모킹제이>는 2개의 파트로 제작되어 각각 2014년, 2015년 연이어 개봉할 예정이다. 사실 2012년 시작된 프랜차이즈 영화 <헝거게임> 시리즈는 북미에서의 엄청난 성공에 비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2014년 3번째로 개봉되는<헝거게임 : 모킹제이>는 전작들과 달리 꽤 주목받으면서 개봉되었다. 제니퍼 로렌스라는 배우의 입지가 달라졌고, 케이블 TV를 통해 <헝거게임>을 본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무협 사극 같은 포스터 이미지와 달리 ‘서바이벌 게임’을 다룬 색다른 블록버스터라는 것도 알려졌다. 갈수록 재미있어진다는 평가도 유효하다. 무엇보다<헝거게임 : 모킹제이>의 가장 큰 매력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에 있다. 서바이벌은 끝났다. 이제 영웅의 탄생과 그 성장이라는 판타지만 오롯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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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구성으로만 보자면 게리 로스 감독의<판엠의 불꽃>은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헝거게임에 나선 소녀 캣니스가 기지를 펼치는 내용으로 꾸려졌다. 일본영화 <배틀로얄>의 표절시비가 있었고, 감독이 원작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것 같다는 혹평도 있었지만, 블록버스터의 틀 속에 미디어의 광폭함과 서바이벌 게임의 잔혹함을 잘 그려낸 오락영화였다. 프랜시스 로렌스로 감독이 바뀐 2편<켓칭 파이어>는 전작에 비해 감독이 원작의 무게를 덜어내고, 자유로워 보이는 작품이었다. 1편에서 무리 없이 이어지고,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일종의 브리지 역할로 충실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영웅이 된 캣니스와 다시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역대 우승자들의 대결을 그렸다.

 

세 번째 이야기이자, 최종회의 첫 번째 파트인<헝거게임 : 모킹제이>는 죽음의 헝거게임이 끝난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상의 게임에서 벗어난 영화 속 현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새로운 판을 벌어야 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이를 위해 줄리앤 무어를 불러들인다. 줄리앤 무어는 13구역의 대통령 알마 코인이 되어 캐피톨의 지배를 받는 12개 구역의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모킹제이’로 캣니스를 지목한다. 줄리앤 무어라는 존재감은 영화에서 꽤 묵직하다. 가족을 위해 죽음의 게임에 나섰던 캣니스는 이제 캐피톨에 남겨진 연인 피타와 억압에 괴로워하는 민중들을 위해 혁명의 불을 지필 모킹제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가상의 게임에서 벗어나 디스토피아의 현실로 돌아온 캣니스가 맞서야 할 대상과의 전쟁은 파트 2로 양보했지만, 소녀에서 영웅으로, 혁명의 아이콘이 되어가는 캣니스의 성장은 무리 없이 극 속에 녹아들어 있다. 게임의 룰을 통해 사회의 지배구조와 그 속에서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던 영화의 메시지는 이번에도 강하게 담겨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세상에 영웅으로 거듭나는 여전사의 이야기는 고루한 듯 하면서도 꽤 매력적인 힘을 가진다. 최초 동생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서바이벌 게임’ 참가자에서 반군을 대표하는 모킹제이가 되면서, 캣니스의 역할이 가족이 아닌 인류를 향하게 되었다. 캣니스는 거침없이 영웅의 자리를 꿰차지는 않는다.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너무 큰 책임을 진 캣니스가 가질 수밖에 없는 심리적 불안감과 갈등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통해 드라마는 풍성해졌지만,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 관객들은 조금 아쉬움을 가질 것 같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여전히 캣니스로 등장하는 제니퍼 로렌스는 그렇게 내면의 성장을 겪는 캣니스를 그려낸다.

 

앞서 말한 것처럼 <헝거게임 : 모킹제이>의 가장 큰 장점은 앞선 두 편의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작 혁명의 이야기는 2015년 개봉할 파트 2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모킹제이>는 사실 뭉텅 반 토막이 잘려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후속편이 기획된 영화라 할지라도, 파트 원에서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조금 세밀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시리즈의 팬이라면 캣니스를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설렘과 더 이상 프랜차이즈 시리즈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겠지만 말이다.

 

굿바이, 필립

 

<헝거게임 : 모킹제이>가 특별한 의미는 또 있다. 지난 2월 갑자기 사망한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공식적인 유작으로 남았다. 파트 2까지 그의 출연분량은 거의 다 완성했다고 한다. 몇 씬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제작진은 그를 위해 시나리오를 수정했다고 하니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팬들은<헝거게임>을 통해 그가 떠난 아쉬움을 달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1997년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츠> 이후 1998년 조엘 코엔의 <위대한 레보스키>, 1999년 폴 토마스 앤더슨의<매그놀리아> 등 역사적인 작품 속에서 줄리앤 무어와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건 그가 살이 쪘다거나 창백한 금발의 배우라서가 아니다. 늘 졸리고 게을러 보이지만, 어떤 영화 속에서건 그는 제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그의 존재감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건 베넷 밀러 감독의<카포티>에서 였다. 깡마르고 신경병적이었던 실존인물 트루먼 카포티 역할을 맡았다고 할 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거절한다면 영화 제작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베넷 밀러 감독의 선택은 훌륭했다. 필립의 인생에서 가장 마른 상태(88kg)로 출연한<카포티>는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25년 동안 50편이 넘는 영화(목소리 출연 포함)에 출연한 부지런함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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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하진 않지만 뜨거운 판타스틱 호러 미스터리 코믹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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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사전에서 ‘뿔났다’는 화가 났다는 뜻이다. 영화<혼스>는 분하고 화가 나서 정말 뿔이 생긴 남자의 이야기다. 2010년<피라냐 3D>를 통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고어 영화의 진수를 보여줬던,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2010년 출간되어 뉴욕타임즈 6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등극함은 물론 전 세계 22개국에 번역된 작가 조 힐의 동명소설 혼스 Horns』가 원작이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욕망을 날카롭게 해부하면서 사랑과 구원을 이야기한다는 극찬을 받은 그가 스티븐 킹의 아들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해리 포터>의 잔영을 지우고 20대 남자배우의 매력을 덧입혀가는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귀여운 얼굴에 당돌한 매력까지 겸비한 주노 템플이 만들어내는 케미까지 더해졌으니<혼스>는 기대해도 좋은 작품인 것 같다. 하지만, <혼스>는 많은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판타지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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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연인 메린(주노 템플)은 이그의 청혼을 거절한 날 저녁,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과 마을 사람들은 용의자로 이그를 지목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그를 살인자라고 믿어 버린다. 연인을 잃은 충격에 더해,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의심받는 상황에 처한 이그는 어느 날 아침 이마에 돋은 뿔을 발견한다. 악마가 된 것일까? 뿔이 생긴 후 그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생겼다. 경찰이건 의사건, 누구건 상관없이 그 앞에만 서면 사람들은 마음 깊이 숨겨둔 지극히 개인적이고 추악하며, 잔혹한 욕망을 서슴없이 털어놓는 것이다. 아야 감독이 가장 공 들인 장면도 뿔 달린 이그 앞에서 자신들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사람들이 가면을 벗고 무장 해제되는 에피소드 들이다. 뿔의 힘과 뱀의 도움을 빌어 이그는 메린을 죽인 진짜 범임을 결국 찾아낸다. 극적으로 보면 당연히 의외의 인물이지만,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중반부가 넘기 전에 범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를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혼스>는 결말을 알고 봐도 상관없는 영화다. <혼스>는 관객과의 두뇌게임을 벌이는 영화가 아니라, 황당함 속에 감춰진 블랙 유머와 선물처럼 등장하는 고어를 즐기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은 B급 영화의 감성을 버리지 못했고, 주노 템플은 언제나처럼 도통 주류 영화의 히로인이 되고 싶은 욕심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해리 포터를 지우려고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혼스>는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변신을 대표할 만한 영화가 될 것 같진 않다. 영화는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넘어 코미디와 로맨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줄곧 장르적 장난을 친다. 충분히 많은 예산이 있었음에도 공 들인 티가 나지 않는 장면들 사이로 신나게 뒤섞인 장르의 뒤범벅이 호기롭게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진 못했다. 뭔가 굉장히 로맨틱할 것 같으면 멈춰서고, 좀 더 잔혹할 것 같은 순간에 딱 거기까지만 보여준다. 연인들의 감성을 흔들어야 할 순간은 장난스럽고, 가장 잔혹해야 할 순간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굳이 장르로 나눠야 한다면 <혼스>는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다. 하지만 사랑과 구원의 가치를 되묻는 원작소설에 비한다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해진 것은 아쉽다.

 

악마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악마도 결국 타락한 천사였다, 라는 대사를 통해 <혼스>는 줄곧 선과 악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악마의 뿔을 단 이그보다 더 추악한 사람들의 욕망을 우스꽝스럽고 씁쓸하게 나열한다. 이그와 멜린의 로맨스를 그린 과거의 장면들은 로맨틱 멜로처럼 서정적이고, 누명을 쓴 이그가 뿔의 힘을 빌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판타지 스릴러의 재미를 충분히 선사한다. 하지만 장르적 재미와 상관없이 뱀과 뿔이라는 상징, 십자가 목걸이가 가진 힘, 그리고 사랑과 구원이라는 결말로 나아가야 할 영화의 후반부는 아쉽게도 줄곧 맥락이 없다. 잠깐씩 등장하는 수위 높은 고어적 묘사도 아야 감독의 팬이라면 짧아 아쉬울 테고, 이야기를 쫓아온 관객들에게는 뜬금없어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혼스>는 때론 사랑스럽고 관능적인 멜로의 색채를 유지하고 있는데다, 곳곳에 재미있는 장면들을 숨기고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토록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고,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애절하거나 진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라니. 그렇게<혼스>는 낄낄거리며 관객들에게 실없어 보이는 농담을 거는 영화다.

 

주목, 주노 템플

 

2007년 조 라이트 감독의<어톤먼트>를 통해 주목받았던 주노 템플은 다수의 실험적인 작품을 통해 차츰 성장해가고 있는 배우다. 2009년 조던 스콧 감독의 <크랙>에서 사건의 열쇠를 쥔 소녀로 등장했다. 2010년 그렉 아라키의 <카붐> 등 실험적인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도발적이면서 의뭉스러운 매력을 드러냈다. 주노 템플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베 실비아 감독의 2010년 작품 <더티 걸>이다. 되바라졌지만 밉지 않고, 마음까지 따뜻한 소녀의 성장영화에서 주노 템플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세상을 비웃지만, 게이 친구와 우정을 나누며 자라난다. 이후의 역할들도 평범하지 않다. 롭 앱스타인 감독의 <러브레이스>에서는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함께했고,<씬 시티 : 다크 히어로의 부활>에선 조연이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다양한 작품에서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존재감을 늘여가고 있는 그녀는 최근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 한<말레피센트>의 시슬 트윗으로 등장, 많은 관객과 소통했다. 도통 주목받는 히로인이 될 욕심이 없어 보이지만, 자꾸 눈길이 간다. 2015년 캐스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영화가 5편 이상 되는 걸 보니, 점점 더 자주 이 배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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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식도로 뜨거운 물을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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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게 생채기를 내는 예술이 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갈증>은 차가운 시선으로 객관화된 이야기를 관찰하게 하는 영화가 아니다. <갈증>은 뜨겁게 부글부글 끓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이 부어 화상을 입히는 영화다. 인간의 가장 저열하고 추악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죄의식을 공유하게 만든다. 마치 상처 난 살갗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의 시점과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배치를 통해 소녀 ‘카나코’의 실체를 되짚어가면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손잡이가 아니라 날이 선 칼날을 관객에게 들이댄다. 그래서 불편하거나 불쾌할 수 있다. 어차피 즐기라고 만든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라는 민낯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 관객에게만 권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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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은 전직 형사 후지시마(야쿠쇼 코지)의 찌질하고 대책 없는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혼한 아내가 갑자기 실종된 딸 카나코(고마쓰 나나)를 찾아달라고 전화한다. 여기에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더한다. 그의 기억 속 딸은 평범하고 착한 아이였다. 단순한 피해자일거라고 생각한 딸의 행적을 쫓아가던 중 후지시마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딸아이의 실체와 마주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딸은 그저 예쁘고 선량한 그런 아이였을까?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폭력밖에 없는 찌질한 후지시마라는 남자의 비극을 우스꽝스럽게 비틀면서, 갈증의 실체를 드러낸다. 전작<고백>을 통해 학교 폭력과 인간의 잔혹함을 차갑고 냉정하게 드러냈던, 테츠야 감독은<갈증>을 통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본 사회의 폐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주 골 깊은 현실이 된 원조교제, 방치된 학원폭력, 배려 없는 이혼가정, 손댈 수 없는 경찰 비리와 야쿠자의 행태 등이 똬리 틀고 있다가 갑자기 독이 든 이빨을 드러내는 뱀처럼, 일상적인 모습으로 동그마니 웅크려 있다.

 

이야기와 주제의 무게감 때문에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가지겠지만, <갈증>은 꽤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비튼다. 타란티노를 떠올리게 하는 키치적인 타이틀도 뜬금없지만, 곳곳에 배치된 스타일리시한 화면 위를 흐르는 음악은 깃털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가장 격렬하고 과격하며 현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표현처럼 그의 영화는 지나치게 냉정하거나, 부글부글 끓는 물처럼 뜨겁다. 과거와 현재,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정신없이 오가는 이야기 구조 속에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인물들, 잔혹한 신체훼손 장면 사이에 뮤직 비디오를 닮은 감각적인 영상, 때론 이와이 슌지가 연상되는 청춘 로맨스 같은 이미지도 녹아들어 있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차가운 복수를 담아내는 <고백>이 냉정하고 차분해서 더욱 차갑고 시린 메시지를 전했던 것과 반대로 악마 같은 딸아이의 행적을 발견하는 <갈증> 속 아버지의 자각은 그 분노의 대상이 용암처럼 들끓어 주위를 모두 녹여버린다.

 

CF 감독 출신답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영상 속에 극단적이지만 충분히 이해 가능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재능이 뛰어나다. <불량공주 모모코>,<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 등 주로 여주인공을 통해 이야기를 직조해 갔다면 <갈증>의 중심은 야쿠쇼 고지가 만들어내는 후지시마에 실려 있다. 잔혹하면서도 찌질하고, 불쾌하면서도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복합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늘 온화하고 밝은 미소로 기억되는 쓰마부키 사토시가 비열한 미소를 짓는 불량 형사로 등장해 불쾌감을 선사하고, 오다기리 조가 비리 경찰로 등장해 반가울 새도 없이 죽어나간다. 백지처럼 연기경력이 없는 신인배우 고마쓰 나나는 선량하고 예쁜 얼굴 뒤에 숨겨진 악마성을 드러낸다. 여기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나카타니 미키가 카나코 실종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담임선생으로 출연하여 테츠야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갈증> 속 세상은 현실이라 더욱 뜨거운 지옥 같아 보인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한 여인의 기구하고 서러운 인생을 화려하고 감각적인 영상 속에 담아낸 뮤지컬 형식의 영화였다. 테츠야 감독은 한 여인의 잔인한 불행을 화려한 춤과 노래, 과장된 CG와 애니메이션 속에 녹여낸다. 이 잔혹한 여성 수난극의 판타지는 이야기를 흩어놓지 않고 그녀의 인생에 ‘희망이라는 자기기만’이 얼마나 간절했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역설’의 미학을 통해 이 보여준 삶의 지옥은 <갈증>에서 더욱 짙어졌다.<갈증>의 마지막 장면은 후지시마의 풀어낼 방법이 없는 죄의식과 집착으로 끝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알게 되겠지만, 후지시마의 기억 속에 아내와 딸 카나코는 CF 속 모녀처럼 정제되고 인위적인 모습이다. 카나코의 과거를 되짚어가는 과정에 카나코와 후지시마가 함께 있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사실이었는지, 후지시마의 환상이었는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후지시마와 카나코는 가장 지독하고, 추악한 욕망 속에서만 함께 한다. 테츠야 감독은 후지시마와 카나코가 결국은 악마의 피를 공유한 하나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카나코와 사랑에 빠진 왕따 소년 나(시미즈 히로야)의 대사는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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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적성에 맞지 않아

 

시민 케인?

 

마치 교과서처럼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공부하고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또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적은 영화가 있다.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도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큰 기대와 걸작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굳이 분석을 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보면,<시민 케인>은 굉장히 스타일리시하고 흥미로운 영화다. 5명의 내레이션과 교차편집, 다양한 촬영기법이 시도되었다. 무엇보다 <시민 케인>의 가치는 지금에도 유효하고 설득 가능한 이야기 그 자체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그 속의 개인의 욕망,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한 질문은 21세기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갈증>에서<시민 케인>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이고, <시민 케인>을 언급하는 <갈증>관련 평론도 꽤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갈증>을 통해 의도적으로 거장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형식으로만 보면, <갈증>은 필름 누아르나 1960년대 탐정영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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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되지 않을 권리를 노래하는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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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문화의 성장기와 그 결과로 예술가들이 배제되는 수순은 참 아이러니하다. 홍대는 근처의 미술대학과 인디 뮤지션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의 거리가 되었다. 최초에 홍대 클럽은 독립 뮤지션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예술가들이 만들어 놓은 상권의 가치가 높아지자, 역설적으로 자본이 모이고 임대료가 높아지고,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대안공간과 예술가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공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다. 홍대의 문화를 일궜던 예술가들이 자본의 논리에 밀려, 설 자리(혹은 살 자리)를 잃어버리는 과정, 그 개발의 전제는 소멸이다. 다큐 영화<파티 51>은 이런 소멸의 과정에 맞서 싸워 스스로를 생존시켜 자립하고 성장하는 인디 뮤지션 혹은 자립음악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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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리반이라는 칼국수 집이 있던 건물이 철거되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시작된다. 한받은 기타를 치고, 박다함은 철거현장 주변을 서성거린다. 하헌진은 “오늘은 있었는데 내일은 없잖아요”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노래하던 공간이 사라지는 소멸의 순간을 묵도한다. ‘두리반’을 중심으로 한 점거의 과정은 아주 흥미롭다. 홍대입구역 부근에 위치한 칼국수 집 두리반은 안종려 사장과 소설가 유채림 부부가 운영했던 아주 작은 가게였다. 공항철도 건설을 위해 건물 자체를 철거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부가 받을 수 있었던 보상금은 이사비용 300만원이 전부였다. 강제철거라는 벼랑에 선 부부는 두리반을 지키기 위해 농성을 시작한다. 부부가 철거에 맞서 싸우는 동안 한받, 밤섬해적단, 박다함, 회기동 단편선, 하헌진 등의 음악가들이 이들을 찾아온다. 거처를 잃을 위기에 놓인 부부와 노래할 곳이 없는 홍대 인디 뮤지션들은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두리반을 거점으로 모여 자연스럽게 음악을 공유하고 ‘두리반’은 농성의 공간에서 창작의 공간이 된다.

 

정용택 감독은 <파티 51>을 통해 두리반에 모여든 음악가와 주인 부부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낸다. 두리반에 모인 음악가와 밴드들은 강제철거 위기 속에서 두리반에서 라이브 공연을 시작한다. 매주 공연이 이어지고, 악조건에도 이들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2010년 5월 노동절 120주년을 맞아 두리반에 60개가 넘는 밴드가 몰려 뉴컬쳐파티 51 를 개최하면서 두리반은 절정을 맞이한다.<파티 51>은 이 공연의 열기와 두리반에 모여 활동한 인디 뮤지션들의 숨결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렇게 말로만 듣던 두리반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진기하고 값진 경험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 긴 호흡의 이야기를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담아낸 정용택 감독은 그 화면 가득 따뜻한 온기를 품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을 환기해보자, 다큐멘터리는 그들이 노래를 하고 지키려고 애썼던 두리반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인디 뮤지션의 협조와 주인 부부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두리반은 합리적 수준의 보상금을 받고, 인근에 다시 칼국수 집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투쟁의 공간이 아닌, 공연을 하고 관객과 만나는 소통의 공간으로서의 ‘두리반’은 사라진 셈이다. 두리반 투쟁은 보상이라는 목표를 이뤄냈지만, 역설적으로 뮤지션들은 노래할 공간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붕괴와 소멸이라는 첫 장면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생존의 문제에 맞서 싸우는 칼국수집에 음악을 할 곳이 없는 인디 뮤지션이 모여 점거에 동참한 것은 홍대라는 인디 신에서 밀려난 음악가들이 스스로 자립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유대감, 그리고 나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손쉽게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현실 인식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인디라는 수식어 대신 ‘자립음악가’라는 정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생생하게 예술가의 성장 드라마를 직조해낸다. 그래서 그들은 건물이 사라지는 소멸의 순간에도 함께 사라지지 않고, 소멸되지 않을 권리를 향해 한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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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농성과 점거라는 소재가 무거워 보일 수도 있지만 <파티 51>은 부담감을 걷고 가뿐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니 선입견을 벗자.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연말,<파티 51>은 삶에 지친 관객들의 어깨를 토닥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무너진 두리반의 공간을 전제로 다시 농성장으로서의 두리반을 되짚어가면서 정용택 감독은<파티 51>에 등장하는 자립음악가들은 오직 노래하는 공간이 주어지고, 노래를 할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다고 증언하는 과정을 경쾌하고 긍정적인 화법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문화를 창조하면서 새롭게 숨 쉴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믿어봄직한 낙관을 이야기한다. 아직 자립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혹은 여전히 생존에 가까운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힘찬 응원가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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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의 낭만적 기억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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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종이인형, 낡은 장식품, 불량식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빙긋 미소 짓게 된다. 어쩌면 징그러웠을 가난과 무지, 소통불능의 기억을 매끄럽게 걸러내고, 폭력과 탄압의 역사를 감춰낸 복고에는 현실과 유리된 매끄러운 낭만만이 오롯이 담긴다. 복고는 꽤 오랜 시간, 우리의 일상 속에서 꽤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살짝 비틀어 보자면 팍팍한 현실을 과거에 대한 낭만적 기억으로 묻어보려는 현실도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여전히 복고의 감수성이 전달하는 따뜻한 위안의 힘은 치유의 순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복고는 그렇게 감수성의 외피와 그 내면이 다르기 때문에 부서지기 쉬운 정서이기도 하다. 추억 가득한 회고담 속 그 시절이 지긋지긋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마냥 밝고 유쾌하기엔 시대적 상처가 크고, 시대적 아픔만을 말하자면 진부해질 수 있다. 그래서 복고적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속이거나, 믿게 하거나, 혹은 설득해야 한다. 당연히 이야기의 진정성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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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의<국제시장>은 우리나라가 겪어왔던 역사의 굴곡을 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담아내면서, 복고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여기에 ‘아버지의 희생’이라는 보편적 감수성을 녹여내면서 감동적인 순간을 직조해 낸다. 한 국가의 역사를 특정 인물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그 삶을 통해 인생의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형식의 유사성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 작품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포레스트 검프>의 처음과 마지막 신에 등장하는 깃털이 나비로 대체된<국제시장>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포레스트 검프>의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적 형식의 차용 혹은 인용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범위이다. 핵심은 격변기를 겪은 덕수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냐에 달려있다.

 

어린 시절 덕수는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을 잃고 부산으로 피난 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수입품 가게를 하는 고모 집에 더부살이를 한다. 덕수의 가슴에는 ‘앞으로 네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 새겨졌고,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열심히 일한다. 청년이 된 덕수(황정민)는 돈을 벌기 위해 독일 광부로 파견도 가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잃어버린 나머지 가족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출연한다.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 덕수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의미 있고, 비통한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다. 노년에 이른 덕수의 모습에서 시작하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한 노인의 회고담이 된다. 이해하기 쉽고, 보편적 정서를 잘 아우르는 윤제균 감독의 장기대로 덕수의 회상은 과거사의 한 덩어리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면서 복잡하지도 지나치게 비장하지도 않게 술술 흘러간다. 윤제균 감독은 척박한 삶 속에서도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는 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격변기를 묵묵히 견디고, 가족들을 보듬어온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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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등 전작들에서 빛을 발했던 서민적이고 지고지순한 등장인물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유머 코드는 <국제시장>에서도 살아있다. 또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는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기도 한다. 황정민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달구 역할의 오달수는 신 스틸러라는 수식이 허투루 붙은 것이 아님을 이번 영화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보편적 감수성’을 위한 스토리 라인의 배치는 아쉽다. 어떤 웃음 뒤에 어떤 눈물을 보여줄지, 어느 순간에 관객들이 눈물을 흘릴지 계산된 연출과 편집은 공식적이지만, 그 덕분에 전체적 이야기는 오히려 도식적인 면이 생겨 생기를 잃는다. 그래서 황정민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줘야 할 덕수라는 인물은 평면적으로 보인다. 역사 속 굴곡을 겪어온 장년층 관객들에게<국제시장>은 웃음과 눈물이라는 감격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관객들에게 <국제시장>은 보온의 기능이 없는, 성기게 만든 스웨터를 입은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매끈하게 정치적 의미를 배제한 이야기 속에 평범한 개인의 희생을 찬양하는 스토리텔링 덕분인지 죽도록 고생한 아버지, 그 과거는 아프지만 이상하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투적인 이미지에 갇히기 쉽다. 어쩌면 우리에겐 쉽게 떠올려지는 올바른 아버지의 이미지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국제시장>을 통해 윤제균 감독이 그려낸 아버지에 대한 헌사는 의미 있지만, 상투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훌쩍 높이뛰기만 하는 것 같다. 개봉 직후 윤제균 감독은 아버지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영화라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감독의 말은 정직하다. <국제시장>은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관객들이 보고 불편할 역사적 장면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복고의 낭만에 기대어 직조된 회고담은 그렇게 정치적 함의를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이 역사와 정치, 그리고 그 함의가 가진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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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별에서 왔을 것만 같은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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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를 상하게 한다. 초기 작품들처럼 신체 변형을 통한 기괴함, 정신착란과 현실의 비틀린 경계에서 오는 어지러움, 혹은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인간의 도덕성을 조롱하는 날카로운 풍자 때문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늘 그렇게 관객들의 비위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과 텔레비전의 몸이 합쳐지는 1983년 <비디오드롬>, 인간과 파리가 한 몸이 되는 1986년 <플라이>, 자동차 사고로 신체가 훼손될 때 오르가즘을 느끼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1996년 <크래쉬> 등 호러장르의 외피를 쓴 그의 작품들은 또 그렇게 신체를 훼손하고 가치를 뒤섞으면서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신화와 농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장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어 놓는 설득력에 있어서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함에 있어서도 그는 여전히 늙지 않고 독창적이고 또한 그래서 독보적이다. 그것이 제2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라 불리는 감독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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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할리우드로 찾아온 소녀 애거서(미아 바시코프스카)는 트위터로 맺은 캐리 피셔와의 인연으로 유명 여배우 하바나(줄리앤 무어)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하바나는 오래전 자신의 어머니가 주인공이었던 영화의 리메이크작에 동일한 배역으로 캐스팅되기를 고대하지만, 쉽지가 않다. 하바나의 심리치료사(존 쿠잭)의 아들이자 인기 아역배우인 벤지(에반 버드)는 자신의 인기가 곧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환영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애거서가 벤지를 찾아오면서,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하나의 과거로 얽혀 있음이 드러난다.

 

얼핏 보면, <맵 투 더 스타>는 할리우드로 날아온 소녀 애거서의 행보와 배역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바나, 불안증에 시달리는 벤지, 방탕한 파티 피플 등, 할리우드 영화계의 어두운 속내를 드러내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많은 영화에서 우리가 봤던 할리우드 영화계의 이면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만나면서 색다른 층위의 이야기로 변모한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영화의 소재가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탁월한 재능이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떤 상담으로도, 어떤 손길로도 해소되지도 구원되지도 않는 불안함이다. 이 불안함은 그들의 삶에 균열을 만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단단하게 빗장을 걸어둔 강퍅한 마음과 현실과 경계를 긋기 못한 환영은 그 균열을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어두운 버팀목이기도 하다. 어느 날 불쑥 찾아든 애거서는 그 균열 위를 겅중대며 뛰어다닌다. 그리고 애거서는 동시에 그들의 삶을 파멸 혹은 구원시킨다. 죽음이 소멸이자, 고통에서의 구원이라는 확고한 태도는 감독이 위선적인 삶을 경멸하는 그 대척점에서 ‘피의 정화’ 혹은 ‘피를 통한 정화’라는 상징을 가시화 한다.

 

<맵 투 더 스타>는 크로넨버그의 작품들 중 비교적 스토리 라인이 명확한 후반기의 영화의 틀 속에 초창기의 기괴한 분위기를 녹여낸 작품이다. 이야기는 이해할만하고, 이미지와 상징은 오히려 단순하단 말이다. 공감할 만한 주인공, 혹은 연민하고 싶은 캐릭터가 없다는 것은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꽤 힘든 일이지만, 빼어낸 배우들의 연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믿게 만든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기행을 저지르는 미아 와시코브스카의 연기도 유려하지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으로 보상받은 줄리앤 무어는 파격적 이야기보다 한 발 앞서 관객들을 설득시킨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연결고리 존 쿠잭과 이야기의 중심 축인 신경증에 걸린 10대 소년 에반 버드의 연기도 잘 조율되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전작<코스모폴리스>에서 리무진을 타던 로버트 패트릭이 리무진 기사로 알바를 하는 배우 지망생으로 돌아와, 전작과의 기묘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재미있다. 얼빠진 듯한 로버트 패틴슨의 등장이야말로 크로넨버그 팬들에게 선물하는 능글맞은 코미디 장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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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리무진 운전기사가 애거서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그녀는 ‘주피터(목성)’라고 답한다. 물론 주피터는 플로리다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의 이름이지만, 애거서는 어쩌면 별에서 별이 되고 싶을 사람들을 별로 만들어주기 위해 내려온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은유는 그녀를 일종의 ‘순교자’로 보이게 한다. 국내 개봉에서는 단수형으로 변화시켰지만, 영화의 원제는<Maps to the stars>이다. 원제처럼 영화 속에는 별과 만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등장한다. 별을 내게 오게 하거나, 내가 별에게로 가거나, 소멸하여 별이 되거나, 소멸시켜 별이 되게 하거나…….이 모든 방법으로 가는 지도는 소녀 애거서의 손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지도에 나와 있는 그 방법으로 그녀는 모든 이들의 구원이 된다. 줄곧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읊조리는 것이 크로넨버그의 영화에 담겼다면 단순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맵 투 더 스타>는 기괴한 방법으로 종교적 순교와 그 구원을 통한 자유를 읊조리는 ‘시’와 같은 영화이다. 물론 그 미세한 울림이 모두의 마음속에 공명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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