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 없는 자의 생존법
바바라 오코너의 원작<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가난으로 붕괴된 가족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인생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열한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 가혹한 현실, 그 속에서 수치스럽고 슬프고, 화가 나는 상황들을 딱 그 나이 아이의 감성으로 그려낸다. 소설 속 조지아는 세상 다 산 것 같은 애어른도 아니고, 속 깊고 다정한...
View Article선의를 결정할 용기
‘선의’라는 명사에 따르는 동사는 ‘주다’가 아니라 ‘베풀다’이다. ‘베풀다’가 내포하는 것이 희생, 포기, 관용이라는 점에서 타인에게 선의를 요구하거나 바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서로를 위해 맞잡은 손과 돈독하게 이어가는 연대는 그게 판타지일지라도 믿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은 조금 더...
View Article그렇게 아버지가 된 아버지의 어떤 것
가족이라는 말에는 묵직한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낭만적 힘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뜻 아버지를 말하긴 어려웠다. 아버지는 늘 부재중이거나 등을 돌리고, 가족이란 이름에 길게 그늘을 드리운 존재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터지면 골치 아프지만, 떼어버려도 별다른 문제없는 맹장처럼, 가족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화두로...
View Article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여행
길을 내딛을 때마다 아픈 기억의 편린들이 길 위에 차곡차곡 쌓이고, 단편적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 길은 마음의 지도가 된다. 압도적인 자연의 풍광과 그 아름다움을 기대한다면, 솔직히 실망할 수도 있다. 사실 거대한 자연의 풍광을 제대로 담아내기만 했다면, 관객들은 훨씬 더 쉽게 매혹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일드> 속 자연은 아무런...
View Article버튼인 듯 버튼 아닌 버튼 같은 조롱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기에 훌륭함이 틀림없다” 앤디 워홀이 남긴 ‘빅 아이즈’ 현상에 대한 평으로 영화<빅 아이즈>는 시작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커다란 눈의 소녀 그림은 프린트를 통해 차곡차곡 쌓인다. 팀 버튼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이미 서두부터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챘을 것이다. 하지만 <빅...
View Article세 치 혀와 세 마디 손가락이라는 흉기
사람들은 정말 사실만 얘기할까? 사람들은 늘 거짓말을 하지만, 누군가가 한 말을 너무나 쉽게 사실로 믿어버린다. 특히 방송을 통해 전달된 이야기라면 혹은 언론인이 전하는 이야기라면 ‘공신력’이라는 포장까지 더해져 맹신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론은 참 쉽게 조작가능하다. 게다가 손쉽고 재빠르게 정보가 퍼져나가는 SNS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의 말은 깃털보다...
View Article편견이라는 이름의 독 사과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럽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있었다. 암호 해독반에 근무하며, 독일군으로부터 유럽을 구해낸 그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앨런 튜링의 업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알려진 것은 영국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실수로 청산가리를 먹고 죽었다는 것 정도라고 한다. 대체 앨런...
View Article한국형 콤비 캐릭터의 유연한 안착
<킹스맨>,<이미테이션 게임>, 그리고 흥행신화를 이어가는 <국제시장>과 맞붙었지만 역시 이변 없이 구정 연휴의 승자는<조선명탐정 : 사라진 놉의 딸>(이하 <조선명탐정>)이었다. 누적관객 300만을 돌파한<조선명탐정>은 명콤비의 탄생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김명민, 오달수의 생생한 캐릭터를...
View Article상처 난 속살에 뿌린 소금
‘나이트 크롤러’라는 단어는 우리에겐 많이 생소하다. 동명의 영화<나이트 크롤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신종 직업 ‘나이트 크롤러’는 한마디로 강력범죄 현장을 쫓는 파파라치 정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모두가 잠들었다고 생각되는 밤, 빠른 차와 고가의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경찰 무전을 훔쳐들으며 로스앤젤레스 일대를 누비는 이들은 차량...
View Article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책장 한 귀퉁이에 꽂혀 있던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집을 꺼냈다. 그의 동명시집 속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절망 속 희망일수도, 희망 없는 절망의 나락일 수도 있는 시구처럼 마지막 장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결이 다르게 읽힐...
View Article아님 말고 내던진 칼날이 향하는 곳
에피소드 1A는 B의 최근 소식을 상세히 알고 있다. B랑 언제 그렇게 연락을 하고 지냈냐는 질문에 A는 심드렁하게 말한다. 만난 적 없어. 페이스북에서 봤어. 에피소드 2짜증나는 전 직장 상사가 아직도 후배들을 괴롭힌다는 소식에 친구공개로 비난의 글을 올렸다. 팔로워도 아닌 직장 동료가 뜬금없이 따진다. 왜 자기 욕을 하냐며……. 에피소드 3모르는...
View Article이기적이고 거친 박동의 오르가즘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숭고함? 예술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솔직히 알란 파커의<페임> 속 낭만은 영화 속 얘기다. 오직 한 길만 걸어와 다른 걸 선택할 방법도 모른 체 너무 빨리 미래가 결정된 아이들은 늘 친구와 경쟁해야 한다. 오디션을 통해 주연과 조연이 결정되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과 승리, 패배와 좌절 사이를...
View Article우아하고 기품있게 착해보기
원작을 비틀어 새롭게 보기가 일종의 트렌드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언제나 신선한 것만은 아니다. 비틀기의 신선함도 잠시, 점점 꼬이는 이야기와 점점 더 강해지는 이야기 사이에서 ‘새로움에의 강요’는 피로함을 누적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취향은 가지각색이다. 클래식의 우아함과 규칙성을 좋아해, 얼마나 원작에 더 가까운지로 성공...
View Article개 같은 개 인생을 책임지라는 경고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특히 정 많고 사랑이 넘치는 개들이 반려동물 중 특히 인기가 있다. 반려견을 위한 케이블 TV도 있고, 반려견 행동전문가가 교육방법을 알려주는 TV 프로그램도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에 <삼시 세끼 어촌편>을 통해 한 뼘도 되지 않는 강아지 ‘산체’ 덕분에 장모 치와와는 없어서 구하지 못하는 품종이...
View Article놓친 사랑의 거리, 그 쓸쓸함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그런 날이 있다.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 날의 날씨, 그 날의 감정, 그리고 그 날의 냄새. 하지만 가끔 그 날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날의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같은 일을 겪었지만, 각기 다른 기억과 감정을 가진...
View Article영리한 반전, 오차 없는 감동 레시피
※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을수록 관람하기 좋습니다. 결말이 알려지거나,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을 담았을 때 리뷰 앞에 경고 문구를 붙이곤 한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써 보았다. 이유는 말 그대로다. <장수상회>는 기대 없이,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강제규 감독이 만든 황혼 로맨스라니 궁금하군, 하는 마음으로 봐야 하는 영화다. 반전이...
View Article과잉은 결핍이 꾸는 꿈 〈아리아〉
주저 없이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그렇지 못했고 그 시절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뿐이다. 다만 지금은 그 지옥에서의 한 시절을 잊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도 변화도 없는 지옥의 한철 같은 사춘기를 겪는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 <인형의 집으로...
View Article그럼에도 다시 삶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기억의 성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촉, 행복했던 날의 냄새, 그리고 달콤한 미각이 포함된다. 게다가 차곡차곡 쌓아온 사회생활과 경력 모두가 오롯이 내 머리 속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니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어떻게 펼쳐질지 모를 미래까지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영화 <스틸...
View Article누가 더 괴물인가에 관한 잔혹 우화〈기생수〉
<기생수 파트1>에 대한 판단을 살짝 유보할 필요가 있었다. 기대가 워낙 커서였는지, 뭔가 하려던 말을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방대한 내용의 원작을 2부작으로 압축하려다 보니 아주 많은 이야기의 가지를 쳐내야 했을 것이다. 주인공 소년 신이치의 내면의 변화와 오른쪽이의 말처럼 ‘악마’에 가장 가까운 것이 인간이라는 자기반성까지...
View Article꼬리에 꼬리를 물어 고리 〈악의 연대기〉
※ 조심했지만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꼬리를 물린 첫 번째 놈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문 마지막 놈의 꼬리를 물어버리면 거대한 하나의 고리가 되는 법이다. 일단 고리가 되어버린 악은 그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모르게 순환한다. 맞물린 자양분으로 근근이 버텨지는 이 순환의 고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끈끈하게 연대해야 한다. 누군가 나서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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